터미네이터 : 다크 페이트 - 또다시 '진짜' 이후의 이야기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얼마 전에 대만여행을 다녀왔는데 거기서는 이 영화 타이틀이 '마귀종결자 : 암흑숙명'이라서 빵터졌습니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이제까지 총 다섯편의 영화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터미네이터'라는 타이틀을 들었을 때 떠올리는 영화는 1, 2편뿐이죠.

이 두 편만이 '진짜'이며 나머지는 정사가 아닌, 이 '진짜'의 아우라를 이용해서 뭔가를 만들어보려고 애썼지만 실패한 결과물쯤으로 취급받습니다. 뒤에 만들어진 영화일수록 더 그래요. 심지어 저 세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고 평가하는 사람조차도 인식이 별로 다르지는 않을 거예요.


1, 2편은 당시 세상을 놀라게 한 영화들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명작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있어서 1, 2편은 기독교의 성경과도 비슷한 존재입니다. 이 시리즈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죠. 만드는 쪽과 즐기는 쪽의 기준과 태도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특히 제임스 카메론은 원래 2편 이후의 속편을 바라지 않았고, 3편 이후로는 손을 뗐기 때문에 1, 2만이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라는 인식은 더 심해졌어요.

이런 문제는 속편들이 실패할수록 점점 더 심화되어서 5번째 영화인 '터미네이터 : 제니시스'까지 오면 정말 이게 하나의 영화로서 온전히 자기 이야기를 하기를 포기한, 터미네이터 팬무비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버리죠. 원작의 판권을 사서 만든, 하지만 원작자가 아니기에 원작같은 무게감으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동인지 같은 영화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는 제니시스를 제법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속편이 나오길 바랐지만, 그건 애당초 2편 이후의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진짜'가 되라는 기대감이 전혀 없기에 그랬기도 할 겁니다.


'터미네이터 : 다크페이트'는 2편 이후 처음으로 제임스 카메론이 다시 제작에 관여한 속편입니다. 또한 그동안의 속편에도 꼬박꼬박 출연해온 아놀드 슈워제네거만이 아니라 린다 해밀턴까지 돌아왔다는 점은 이 영화가 실패한 3개의 속편과는 뭔가 다를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듭니다.


일단 저는 재미있게 보고 왔습니다.


1, 2편의 속편으로서 어울리는, 걸작의 향기가 나는 그런 영화였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전 이제 더 이상 그런 터미네이터 영화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터미네이터라는 소재를 갖고 이야기를 하는 한에는요.


다만 이 영화는 이전에 만들어진 미래전쟁의 시작과 제니시스 2개의 속편과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팬무비스럽지 않다는 겁니다.

미래전쟁의 시작과 제니시스는 팬질하듯 복잡한 설정 놀음하다 수습을 못했죠. 제니시스는 멀티버스 설정을 꺼내든 후에 이야기의 앞뒤를 맞추는 것조차 제대로 못해서 너무 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크페이트는 그런 길을 가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단순명쾌하게 정리해놓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영화에요.


이 정리방식은 아무리 봐도 기존 팬들에게는 꽤 반감을 일으킬 게 뻔하긴 합니다. 시작하자마자 존 코너를 없애버리니까요. 그런데도 그냥 질러버리는 것은,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였을 겁니다. 전 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봅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이제 그만 속편 제작 따위 하지 않고 놔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닌 이상은 말이죠.

1, 2편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운명에 저항해서 미래를 바꿔놨음에도 결국은 시간이 뒤로 늦춰졌을 뿐, 결국은 형태만 조금 바꿔서 같은 미래가 반복된다는 점은 터미네이터3부터 죽 비난 받아온 부분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이 직접 제작한 다크 페이트도 이 문제를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미래에서 터미네이터가 날아오는 속편을 만드는 이상 결코 피할 수 없는 함정입니다. 이제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보는 관객은 '이 이야기는 이런 거지' 하고 넘어가줘야 하는 기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함정을 피해가기 위해 아예 미래를 배경으로 삼은 미래전쟁의 시작이 나왔지만, 그것도 망해버렸으니까 어쩔 수가 없죠.


다크 페이트는 꽤 많은 것들이 이전 시리즈의 반복이고, 오마쥬지만 그럼에도 동인지 같은 느낌은 나지 않습니다. 그건 미래전쟁의 시작이나 제니시스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제임스 카메론이 있기 때문이겠죠. 물론 감독은 팀 밀러입니다만, 일단 상황을 최대한 단순화시켜놓고 명쾌한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각본에 제임스 카메론이 관여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건 아마 배우의 힘도 있겠죠. 나이 든 린다 해밀턴의 사라 코너는, 이 시리즈가 나이 먹은 만큼 '진짜'의 존재감이 있습니다. Fuck를 입에 달고 다니는 노년의 여전사는 그 자체로 카리스마가 철철 넘쳐요. 린다 해밀턴과 아놀드 슈워제네거, 제임스 카메론의 존재가 모인 동창회 추억팔이 영화라는 평가는 피할 수 없겠지만, 그건 그 자체로 이전의 속편들과는 차별화되는 강점입니다.

하지만 이 조합은 좀 실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캐릭터가 별로 재미가 없었거든요. 각본상 합리적인 캐릭터일 수는 있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니었습니다. 나이 든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린다 해밀턴의 관계성이 어느 정도는 그런 문제를 해결해주지만,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이 관계성이 훨씬 매력적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액션은 꽤 좋습니다. 새 터미네이터인 Rev-9가 강력한 적으로서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어필되고 있기에 추격당하면서 위기에 빠지는 스릴감도 살아있고, 서로 치고 받는 액션도 박진감 있게 잘 연출됐어요. 몇몇 액션 파트는 신선하기도 하고요.


이야기의 구성 요소들은 좀 더 현대적이 되었고, 적의 강력함은 잘 부각되었으며, 새로운 캐릭터의 캐스팅도 좋았습니다. 여전사들의 활약은 확실히 매력적인 부분이었어요.


쿠키영상이 없는 것도 좋았습니다. 이 영화는 요즘 할리우드의 수많은 영화처럼 '우리는 이게 잘 되면 바로 속편을 만들 거야. 이건 거대한 계획의 일부일 뿐이라구!' 하는 대책없는 상업적 야심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않아요. 잘 되면 속편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냥 이대로 끝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그런 분위기가 좋더군요.




덧글

  • DAIN 2019/10/31 14:03 # 답글

    터미네이터2 이후로 코너 모자가 미국 시골에서 계속 떠돌며 살았으면 3편 루트고, 멕시코 거쳐 남미 쪽으로 갔으면 다크 페이트 루트~라는 망상이 떠오르더군요. ㅎㅎ
  • 로오나 2019/10/31 14:10 #

    다크페이트를 보면서 3편에서 존 코너 캐스팅만 미남 배우로 잘 해놓고, 적 캐릭터를 이번만큼 해줬으면 평가가 어땠을까... 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 더카니지 2019/10/31 17:52 # 답글

    T3와 상당히 유사해서 카메론식 T3 리메이크 같았어요. 정통 직계 속편이라기보다는 그냥 가능성의 평행우주 중 하나같은 느낌.

    개인적으로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 최악이라고 생각하지만 T5에서 제시한 엉망진창으로 꼬인 시간대, 스카이넷과 관련된 무수한 평행우주 개념은 흥미롭다고 생각해요. 스카이넷은 시간 여행을 발명함으로써 영원한 지옥 문을 연거죠. 무한한 평행우주들 속에서 인류와 스카이넷의 끝없는 전쟁...
  • 로오나 2019/10/31 20:09 #

    3편부터의 속편들을 부정했지만, 이 영화는 그 영화들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죠. 전 그래도 이게 팬무비가 아닌 정통 속편으로서의 무게감은 갖췄다고 느꼈습니다.

    제니시스야말로 설정놀이의 극한이었지만, 전 정말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꽤 재밌게 봤습니다. 일단 거기서 팝스의 캐릭터가 정말 좋았기 때문에 다크페이트의 칼과 비교가 많이 되더군요.
  • 역사관심 2019/11/01 00:45 # 답글

    "적의 강력함은 잘 부각되었으며,"---> 이 부분에서 일단 기대감을 가지게 합니다. 2편이후 망작들에선 전혀 이 매력이 없었죠.
  • 로오나 2019/11/01 01:55 #

    추격전의 스릴은 꽤 잘 나왔다고 봅니다.
  • Ryunan 2019/11/01 11:35 # 답글

    빌런이 강력하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어요. 내구성은 탁월했지만 그냥 질기다는 느낌이랄까요.

    우리 편 서포터 신캐가 어설픈데다 파티가 소규모라 희생자가 딱히 없어서 더 그랬나 싶기도 하네요.
  • 포스21 2019/11/21 16:08 # 답글

    터미네이터 프랜차이즈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솔직히 존 코너를 놓아주는 건 저도 찬성입니다만...
    확실히 단독영화로는 볼만했지만 명작인 1,2편과 같은 걸 기대한 사람은 또 실망할 듯 합니다.
  • 로오나 2019/11/21 16:37 #

    1, 2편의 아우라를 이을 무언가를 기대하는건 무리라고 봐요. 그런 기대감은 내려놓은 사람만이 재미있게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가장 좋은건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그냥 놔주는 거겠죠, 이제;

    다크페이트도 흥행이 망해서 그렇게 될 것 같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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