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 러브 코미디인 줄만 알았어





일본에서 관객 1570만명-일본 흥행수익 205억엔 돌파, 역대 일본 영화 흥행 2위,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2위, 역대 일본 박스오피스 4위라는 대기록을 수립하고 중국에서도 단 열흘만에 그 이상의 흥행을 기록한 초대형 히트작.

이전부터 신카이 마코토는 국내에도 코어 팬층이 존재했습니다만, 전작들의 흥행은 실로 소소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저 정도로 히트하고 나자 국내에서도 그 사실 자체가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예매율부터 돌풍을 일으키는 상황이 벌어졌죠. 지브리 작품도 아닌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창 수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잘 나가는 국산 블록버스터를 밀어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일이 일어나고 만 겁니다.

저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팬이 아닙니다. 그냥 관심이 없다는 정도를 넘어서 이전 작 두 개를 보고 '이 감독의 작품은 취향에 안 맞는다'고 생각해서 뭐가 나와도 시큰둥했던 쪽입니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이 일본에서 국민적 히트를 기록하고 국내 개봉하니 한번쯤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보고 나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 훌륭하군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초속 5센티미터' 시절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아니네요.

전작들이 가졌던 장점은 극대화되고, 대중적인 설득력에 방해되는 단점은 최소화되어서 대중성이 훌륭한 작품이 나왔습니다. 감성이 잘 살아있으면서도 개그가 잘 섞여있어서 몇몇 포인트에서는 관객들이 다같이 빵터져서 웃기도 했고, 지루하게 늘어지는 부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음악 활용도 좋았고요.

이건 마치 할리우드에서 굉장히 자기 테이스트를 짙게... 일부 코어 팬층은 좋아하지만 너무 진해서 불편해하는 사람도 많은 그런 마이너한 독립영화를 찍던 감독이 블록버스터의 연출자로 발탁되어서 자신의 감성은 살리면서도 대중적으로 잘 만들어놓은 결과물을 봤을 때의 그런 느낌입니다.


실제로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는 제작비가 불과 200만엔, '초속 5센티미터'도 2500만엔 밖에 안 되었는데 '너의 이름은'은 3억 7000만엔을 들였으니까요. 제작비가 커진 만큼 인력도 늘어났을 것이고, 당연히 그만큼 대중적으로 다듬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도가 성공적이라는 점이겠지만요.

하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엄청 많아 보이는 제작비도 사실 전혀 많은 편이 아닙니다. 일본의 다른 메이저 극장 애니메이션들과 비교해 보면 '에반게리온 Q'가 13억엔, '벼랑 위의 포뇨'가 34억엔이었다죠. 저것들은 일본에서도 초대형 작품들이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의 이름은'의 제작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본작을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이 더 강해져요. 도대체 이걸 어떻게 저 제작비로 만들었지? 터무니없는 열정 페이의 냄새가 난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평이 난 영상미는... 어, 그럴 만 하네요.


사실 저런 적은 제작비로 그동안 정평이 날 정도의 배경 영상미를 만들어냈다는 게 좀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이전작들과 달리 인물 작화도 훌륭하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의 다나카 마사요시가 캐릭터 디자인으로, 그리고 작화 감독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모노노케 히메', '추억의 마니'의 안도 마사시를 영입한 덕분에 나온 성과라는군요.

구조적인 문제가 심각하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지만, 다행히 제작사인 코믹스 웨이브 필름 쪽은 '너의 이름은'의 대히트로 발생한 수익금을 애니메이터들에게도 인센티브로 지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용에 대해서는... 스포일러가 좀 섞이겠습니다.



예고편을 보고는 남녀 고등학생 두 명이 서로 몸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우당탕탕 러브 코미디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일본 특유의 감동물로 가나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니 이게 웬걸?

그런 분위기는 초반부를 장식하고 있을 뿐이군요. 심지어 별로 작심하고 웃기려고 하거나 시끌벅쩍한 분위기도 아니에요. 서로 성별이 다른 몸에 들어갔다는 사실조차도 깊이 있게 파고 들지 않습니다. 만약 그 소재에 집착했다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겠죠.

그 소재가 필요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이 작품이 러브 스토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이유가 없어요. 만약 러브 스토리를 배제하려고 했다면 남-남 혹은 여-여로 만들었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을 소재들의 집합입니다. 그랬다면 도시와 시골의 삶의 대비와 두 사람의 성격 차만으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 같네요.


종합적으로는 러브 스토리를 메인으로 삼은, SF적인 구석도 약간 있는 오컬트 스릴러 정도가 아닐까요? 예기치 못한 미티어 폴이 가져오는 재난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부분이나, 분명히 서로를 인식하지만 깨어나고 나면 불분명하고 흐릿해져버리는 기억의 실체를 의심하면서 괴로워하는 부분 등에서 친숙한 장르적 향취를 느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상황을 이해해서인지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갈구하며 몸부림치는 부분도 절절하게 와닿았고요.


다만 보다 보면 내용상으로는 '기억이 흐릿해졌다'는 것만으로는 커버되지 않는 허술한 점들이 보입니다. 예를 들면 몸이 바뀐 두 사람이 서로의 시간 차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부분이나, 이토모리 출신 아저씨를 만나기 전까지 엄청 유명할 수밖에 없고 사진전에 대해서 조금만 조사해도 나왔을 이토모리를 아무도 몰랐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건 그냥 작품 내에서 중요한 목표를 위해서 그 구멍을 감수해버린 케이스라고 봅니다. 이성적인 접근이 중요한 작품이었다면 심각한 에러였겠지만 감성적인 접근이 중요한 작품이다 보니 감수할 만한 트레이드오프였던 것 같아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인터뷰만 봐도 원래는 날짜와 요일까지 동일하게 맞출 예정이었다가 그렇게 하면 두 사람의 나이 차가 5살이나 되어버리기 때문에 포기했다고 하니 철저하게 의도된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작품의 방법론, 이성적인 부분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감성적인 부분을 극대화하는 것에 충분한 설득력을 느끼지 못하는 관객에게는 이 부분이 큰 흠으로 보일 수밖에 없겠지요


어쨌거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차기작도 이런 노선으로 간다고 하니, 앞으로도 기대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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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pyz 2017/01/08 13:39 # 삭제 답글

    작화 및 기타부분은 따로 토를 달지 않아도 될정도로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딱 하나 보고나서 마음에 좀 걸렸던게 마지막에 기억이 흐릿한 상태에서 취업활동도 지지부진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주인공(다른 등장 인물들의 생활을 보여주면서 좀더 대비가 되더군요)을 보면서 저런 '기억상실이나 뭔가로 인해 마음에 응어리를 가진 사람은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는 부분이 좀 마음에 안들었습니다. 그냥 잘 살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가지고 있다는 형식은 이후를 표현하기 애매했을까요?
  • 로오나 2017/01/08 20:17 #

    그런 식으로 표현했으면 뉘앙스가 완전 다른 이야기가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막판이 너무 답답하긴 했죠. 그 부분은 약간 줄이거나 에필로그적인 느낌을 살려줬어도 좋았을 것 같아요.
  • Uglycat 2017/01/08 14:00 # 답글

    저는 지난 11월에 현지에서 직접 보았는데, 히트할 만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신카이 감독의 장편작은 초속 5센티미터와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빼고 모두 보았는데 감독의 연출력이 이번 작품에서 정점에 달했다고 봐요...
  • 로오나 2017/01/08 20:18 #

    초속 5센티 때만 해도 제가 별로 안 좋아했던 신카이 마코토의 감성이 여기서는 매력적인 감성으로 절제되어 있고 개그와 영상미 등도 전부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균형감이 좋더군요 :)
  • jei 2017/01/08 14:05 # 삭제 답글

    신카이 작품을 초기부터 쭈욱 접해왔지만 이번작은 진짜 같은사람이 만든게 맞나 싶은 기분이더군요
    그 전까진 작화(특히배경)가 멋있다 말고는 딱히 와 닿는것이 없었는데 이번건 꽤 재밌게 봤거든요

    다만 이번작이 너무 대박이 나서 감독이 쓸데없는 압박을 받거나 하지 않았으면 하네요
  • 로오나 2017/01/08 20:18 #

    압박은 이미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ㅎㅎ

    기존 신카이 마코토 작품을 많이 보진 않았지만 제가 별로 안좋아했던 감성의 농도가 적절하게 절제되면서 개성과 매력으로 살아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포스21 2017/01/08 14:10 # 답글

    구조적인 문제가 심각하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지만, 다행히 제작사인 코믹스 웨이브 필름 쪽은 '너의 이름은'의 대히트로 발생한 수익금을 애니메이터들에게도 인센티브로 지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 요 근래 , 일본 애니관련해서 들어본 이야기중 제일 희망적인 이야기네요.
    그러고 보니 스탭롤 중에 은근히 우리나라 사람처럼 보이는 이름도 좀 있던데... 다들 한몫 챙기셨기를 바랍니다. ^^
  • 로오나 2017/01/08 20:19 #

    저런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구조적인 문제에 반발해서 몇몇 독립 스튜디오들은 수익이 제대로 배분되는 구조를 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신 제작비 조달과 흥행 실패시의 리스크 등이 따라오겠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 요다카바 2017/01/08 15:51 # 답글

    에필로그만 좀더 길었으면 아쉬웠음 ㅠ
  • 로오나 2017/01/08 20:20 #

    거긴 저도 약간 아쉬웠습니다. 깔끔하긴 한데 그 후의 두 사람을 스탭롤에서 정지화면으로라도 몇컷 보여줬으면... 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 이젤론 2017/01/08 20:12 # 답글

    김춘수의《꽃》이 생각나더군요. 저는 ㅇㅇ;;
  • 로오나 2017/01/09 09:40 #

    감성적으론 묘하게 순문학스러운 그런 느낌이 있죠. 그게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감성인거 같고.
  • spawn 2017/01/08 21:54 # 삭제 답글

    저는 감독의 작품을 처음 보았는데 그럭저럭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좀 전개가 엉성한 면도 있었지만 개그도 좋았고 로오나 님 말씀대로 로맨스가 많은걸 커버주는 느낌이었네요.
  • 알트아이젠 2017/01/08 23:58 # 답글

    저도 처음에는 평범한 러브 코미디로 가나 싶었는데, 반전부터 좋은 의미로 통수를 맞았네요. 기대이상이었습니다.
  • 로오나 2017/01/09 09:39 #

    정보를 많이 알지 못하고 간게 좋았던 것 같아요.
  • RuBisCO 2017/01/09 04:26 # 답글

    블루시걸이 23년전 물가로 15억 아마게돈이 23년전 물가로 25억 제작비에 14년전 원더풀 데이즈 제작비가 당시 물가로 106억이었던 였던 한국을 생각하니 (...)
  • 로오나 2017/01/09 09:39 #

    하지만 2011년에 마당을 나온 암탉이 30억 제작비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 키르난 2017/01/09 09:39 # 답글

    탐라 어드메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적게 들었던 것은 인건비의 문제도 있더군요. 그러니까 주요 제작 인원들은 정직원이랍니다. 지브리에서 넘어온 애니메이터들도 정직원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인건비가 빠져서...라고 이해했습니다. 정직원이기 때문에 인센티브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고요.'ㅂ'
  • 로오나 2017/01/09 11:36 #

    제작비에 정직원의 월급이 빠졌을리가 없죠;
  • NRPU 2017/01/09 10:54 # 답글

    울면서 가슴 주물대던 장면이 여러가지 감정을 느끼게 해주던...
  • 로오나 2017/01/09 11:36 #

    그 부분은 참... 걸작이었죠 ㅋㅋㅋ
  • ㅇㅇ 2017/01/09 12:31 # 삭제 답글

    정말 명작입니다. 에필로그가 무척이나 아쉽지만......
  • 새누 2017/01/10 20:17 # 답글

    로오나님에게도 좋은 평가가... 개인적으로 남녀가 서로 만나기 위해 운명 자체를 바꾼것도 참 멋지다는 생각이...
    제작비가 적은건 열정페이가 아니라 신해성(신카이 마코토)감독의 제작방식이 제작비가 적게 들어가는 편이기도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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