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인 더 스카이 - 그렇게나 무력하고 답답하고 힘든



국내에 걸리긴 걸릴까 싶었는데, 걸렸다는 말을 듣고 꼭 극장에서 보고 싶어서 보고 왔습니다. 예상대로 상영관은 아주 적었고, 상영횟수는 더 적었습니다. 제가 평일 오후에 영화를 볼 수 있는 프리랜서라 보러 간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중에 VOD로나 봐야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홍대 롯데시네마에서 봤습니다. 롯데시네마는 갈수록 웹 서비스가 엉망진창이 되어가지만, 하여튼 홍대 롯데시네마 만큼은 매번 갈 때마다 상영관마다 마스킹을 해주는 게 좋습니다. 극장이 최적의 관람 환경을 위해 마스킹을 해주는 것은 참 당연한 것인데 해주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쳐주고 싶다니, 당연한걸 당연하게 하기가 이렇게나 힘든 세상인가 봅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사전 정보와 예고편만 보고도 떠올렸던 이미지가 있습니다.


-아, 이 영화는 그렇겠구나. 무력하고 답답하고 힘든 영화겠구나.


그리고 예상대로의 영화였습니다. 다 보고 나니 무척 피곤하군요. 그렇게 잘 만들어진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것은 드높은 해외의 평가나 소재 때문이라기보다는 헬렌 미렌 여사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저는 이 할머니 배우를 좋아하게 됐는데, 이 할머니가 대령님 소리를 들으며 군인들을 지휘하는 역할로 나온다고 하니 정말로 보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그녀에 대한 기대감은 이미지적으로는 잘 맞아떨어졌는데 연기 면에서는, 이 영화는 그렇게까지 연기력을 발휘할 여지가 많진 않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연기력이라는 기준에서 저를 만족시킨 것은 다른 배우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배우는 연기력을 발휘하는 것뿐 아니라 그 배우가 지닌 이미지 자체가 큰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고, 저한테는 이 영화 속 헬렌 미렌 여사가 그랬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이 군사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대령님 역할을 맡는 것 말고도 눈에 띄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원래 미군에 여군이 많다고는 하지만 여군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요즘 추세 때문인지 일부러 신경 써서 배치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속 주요 캐릭터 중에는 고인이 된 앨런 릭먼이 나옵니다. 스네이프 교수하고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의 캐릭터입니다만 괜히 짠해지더군요.


영화는 홍보대로 드론 전쟁의 윤리성과 책임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술이 발달하고 전쟁이 첨단화되어갈 때, 많은 사람들이 점점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들의 인식이 현실과 멀어져서 그 상황을 제대로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버튼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데, 모니터 너머 머나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마치 게임을 하듯이 쉽게 타인의 생사를 결단하게 되면서 인간성을 잃게 될 거라고요.

하지만 인간은 상상력이 뛰어난 생물입니다. 특히 상상력을 발휘할 소스가 존재할 때는 더 그렇죠. 자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일들,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을 생생하게 상상해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지만 이미 벌어졌던 일이 소스로 주어진다면 누구나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드론을 통해 수천 킬로미터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쏴 죽이는 일도, 광신도들의 자폭 테러도 이미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자기들의 결정이 불러올 결과의 무게를 알아요. 그 무게를 무거워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실로 현실적입니다. 보다 보면 그들의 마음 속 진심이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지요.


'씨발! 왜 나야! 왜 나한테 이런 문제가 떨어진 거야! 이런 문제를 책임지기는 싫다고!'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그들을 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 벌어졌을 때 책임을 지라고 저런 자리에 앉혀서 권한을 쥐어준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영화는 정말 현실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오락용 블록버스터였으면 5분만에 결정났을 의사 결정 문제와 작전 진행 과정을 2시간에 걸쳐서 차분하게 보여주는데, 꼼꼼하게 담아낸 이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저 사람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하겠다는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눈치볼 존재가 없는 영국 정부와 눈치볼 존재 따위 없는 미국 정부의 태도 차이도 참으로 인상적인데, 역시 오락용 블록버스터였으면 과격한 결단 쪽이 시원상쾌하다고 말하고 끝나겠지만 여기서는 생명을 자국민과 타국민의 숫자로만 판단해서 결단해버리는 그런 태도가 정말 섬뜩하고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미국 정부와, 결국 직접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미국 드론 조종사들의 태도가 크게 차이난다는 점도 잊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개빈 후드 감독은 과거 '엑스맨 탄생 : 울버린'과 '엔더스 게임'을 연출했던 감독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니 왠지 종종 큰 영화들을 연출했던 감독들이 좋은 제안을 고사하고 작은 영화를 하러 가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 피상적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개빈 후드 감독의 전작들과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좀 더 잘 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덧글

  • spawn 2016/07/18 15:37 # 삭제 답글

    저는 누군가의 평론대로 악어 눈물식 영화라고 느껴지던데요. 물론 왠만한 영화들보다는 낫기는 낫지만 말입니다.
  • 로오나 2016/07/18 16:04 #

    그런 관점으로 볼 수도 있겠죠. 중요한 것은 악어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 모두 공감, 이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는 점입니다.
  • 김치찌짐 2016/07/21 23:07 # 답글

    2016년 3월 31일 기준 미공군의 전체 인력 중 19.1% 58,943명, 2015년 7월 기준 미해군은 예비역을 포함했을 경우 20%, 67,687명이 여성입니다. 2016년 기준 한국군은 9,800여명으로 전체 병력 63만명 중에서는 1.5%를 차지하고 있으니 단순 비율로 한국군보다 12.7배 이상 여군이 많다고 보면 될거 같군요.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부문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고서 살아가고 있는데, 상황이 닥쳤을 때 이들의 판단과 행동을 비난 할 수 있느냐는 거였습니다.

    영화 내내 윤리적인 이유로 공격을 반대하던 '안잴라'가 결정적인 순간에 80명의 무고한 희생자보다 1명의 아이의 목숨이 여론전에서 더 불리하기 때문에 후자를 선택할 것이라고 밝히는건 다소 억지스러운 장면이었지만, 솔직하고 타당한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대령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는 쉽지만, 대령을 비롯한 일선 관료와 전문가들이 장관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과 같이 책임회피와 자기보신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안잴라처럼 행동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돌아오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한다고 비난 할 수는 없을거 같습니다. 그들의 행동 또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로우면서 남에게는 빡빡한 기준을 내세우는게 당연한 우리들의 모습이니까요.
  • 로오나 2016/07/22 15:49 #

    -확실히 한국보다는 훨씬 많지만 그걸 감안해도 작중 역할 배분상 의도적으로 비중을 높게 잡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비난할 수 있는가, 에 대해서 원론적으로만 말하면 당연히 비난할 수 있습니다. 잘못했을 때 비난받고 책임지라고 권한을 주고 뽑아놓은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이 납득이 가고 거기에 대해서 생각할 꺼리를 얻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의미겠지요.
  • Uglycat 2016/07/23 21:23 # 답글

    전 오늘에서야 가까스로 보았는데, 목숨을 저울질한다는 게 얼마나 피말리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는 느낌입니다...
    여담으로 감독 본인이 작중에 카메오로 나왔다고 해요...
  • 로오나 2016/07/27 20:09 #

    어라, 그랬나요? 감독 얼굴을 몰라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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