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카이폴 - 늙은 본드의 뜬금없이 기묘한 모험



스포일러분이 다량 함유되어있습니다.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작입니다. 전 아이맥스로 보고 왔는데 보람이 넘칩니다. 정작 아이맥스 촬영분은 하나도 없는데(...) 화면비는 아이맥스 화면비라서 위아래가 꽉 차게 보입니다. 아이맥스 촬영이 아닌데도 일반 상영관에서는 위아래를 잘린 채로 봐야 한다니 이것도 좀 웃기는군요.

시각적인 만족감은 훌륭해요. 모든 액션 장면은 멋지게 연출되었고 정평이 난, 아델의 노래와 함께 하는 오프닝 시퀀스는 아주 근사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샹하이 빌딩에서의 그림자 격투씬. 보면 샹하이-마카오 파트는 특히 으리으리하던데 이게 그냥 중국을 넣자고 생각해서 넣은 건지 아니면 중국계 자본이 뒤에 있어서 넣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헐리웃에 중국계 자본이 스폰서로 나서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영화 속에 중국이 자주 등장하죠. 아, 뒷사정이 어떻건 샹하이 파트도, 마카오 파트도 007 보면서 기대할만한... 호화찬란하고 삐까뻔쩍한 도시와 그 속에서 수트 간지를 뽐내는 007의 비주얼을 충분히 만족시켜줘서 불만은 없고. '퀀텀 오브 솔러스'의 경우는 내내 황량한 황야만 뛰어다니느라 이런 맛이 심히 부족했죠.


이 영화를 얼마나 좋아할 수 있느냐는 클래식 007에 대한 추억과 애정이 얼마나 있느냐로 결정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기존 팬들을 깨알같이 만족시켜줄 옛 클리셰들이 오마쥬 형태로 영화 속에 촘촘히 차있죠. 전 딱히 007 시리즈의 팬은 아니고 다니엘 크레이그의 시리즈로 넘어오기 전에는 드문드문 보면서 추억에 담아둔 정도라서 그러한 요소들이 그렇게 인상깊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오, Q가 나왔어. 근데 잘 생기고 뺀질거리는 오타쿠 같은 녀석이다!' 라던가 뒤에 나온 옛 본드카를 보며 피식거린 정도지요. 머니페니의 경우는 누군지 기억도 안났고.


이 영화를 보고 '퀀텀 오브 솔러스'를 무시한 '카지노 로얄'의 속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그 의견에 공감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양쪽 모두의 후속작이면서, 동시에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후속작이기를 거부한... 많은 세월을 건너뛴 이야기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는 상, 하편 구성으로 애송이 제임스 본드가 비극을 겪고 에이전트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그렸는데 이 영화에서 본드는 이미 활약은 할만큼 하고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퇴물 취급을 받고 있어요. 심지어 영화 속에서는 '카지노 로얄'의 패턴은 부정하면서 '퀀텀 오브 솔러스'의 대사는 비꼬면서 가져오기까지 합니다. 본드가 돌아왔을 때, M은 다시는 자기 집에 몰래 침입하지 말라고 화를 냈던 '카지노 로얄'의 과거는 잊은 것처럼 능청스럽게 행동하죠. 하지만 '후회를 하면 프로가 아니다'라는 '퀀텀 오브 솔러스'의 대사는 고스란히 가져옵니다. 물론 나름 묵직한 울림이 있던 그때의 그 대사가 여기서는 심히 궁핍한 변명처럼 들립니다만.


근데 그렇다고 퀀텀 조직 이야기가 사라져버린 게 아니냐 하면 그건 아니라서, 그쪽은 이제 기대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퀀텀은 매력적인 형태의 조직이었고 살아서 도망친 미스터 화이트는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지만, 그걸 이어나가기에는 '영화 속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어요. 방법은 다음편에서 주디 덴치가 M으로 부활하면서 '스카이폴 사건이 터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를 프리퀄로 찍어주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쫓았지만 성과가 없었던 퀀텀이 MI6가 흔들리는 것을 틈타 부상하면서 전면전이 벌어진다... 정도의 패턴이겠는데 둘 다 별로 희망 없어 보입니다.


어쨌든 현실에서 007 시리즈가 안나온지 4년이 흘렀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원래 애송이 취급 받기에는 좀 많이 노안이긴 했지만 여기서는 확실하게 늙어보입니다. 일부러 더 늙게 분장해서 그런 점을 강조한 것 같아요. 이 이야기는 늙은 본드의 이야기이며, 또한 이 시리즈 자체가 나이 들었음을 인정하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옛 시리즈의 추억을 불러와서 재단장시킴으로써 시리즈를 재정비하는 모습을 보여주죠.


전체적으로 영화는 후반부로 가기 전까지는 지루한 부분이 별로 없게 잘 구성되어 있고, 인물들간의 갈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에 거기에 몰입하면서 따라가는 맛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스토리의 설득력은 실종되고 전개가 뜬금없이 튀어요. 그저 낙관적으로만 봐주기에는 이 영화는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많은데, 거기에 설득력을 부여할 의무를 방기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만 계속하고 있어요. 이런 놈을 보여주고 싶었지, 이런 상황을 연출하고 싶었지,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지, 그걸 위해서라면 딱히 개연성과 설득력이 필요하진 않아,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크게 거슬렸던 부분은 셋입니다.


1. 본드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났나?

그렇게 맞고 그렇게 떨어졌는데 어떻게 살아나서 어딘가에서 타락한 휴가를 즐기고 있는지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전 처음엔 같이 뒹굴고 있는 여자가 구해준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것도 아니더군요. 절벽으로 떨어지면 기연이 기다리고 있는 옛날 무협소설에서도 이러진 않습니다. 하지만 좋아요. 그건 그냥 넘어가기로 하죠. 제임스 본드가 살아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해! 그냥 살아나고 싶으니까 살아나는 거지! 나의 근사한 취미를 보고 열폭하라고! (그의 취미는 '부활'입니다)


2. 청문회 습격 때 MI6는 대체 왜 카톡질... 아니 채팅만 하고 있는가?

이 부분은 보면서 정말 어이가 없었던 부분입니다. 테러리스트가 거기로 가는걸 뻔히 알고 있는데, M만이 아니라 많은 주요인물들이 모여있는데 '국장님 피신시키라고!' 라는 기관이기주의(?) 채팅만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처발려요. 맙소사. MI6에는 요원이 본드 밖에 없나요? 빨리 지원 때려서 현장에 급파도 시키고, 시간에 못맞출 것 같으면 최소한 거기 경계 서고 있는 인력들한테 정보를 주고 경고해서 경계태세에 들어가게라도 만들었어야죠. 하지만 작중에서는 그냥 멍때리고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실바와 유쾌한 친구들에게 신나게 털립니다. 이것만으로도 MI6가 국가예산을 낭비하는 쓰레기 조직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M은 퇴임할 때가 지났고, MI6는 없는 편이 나은 것 같아요.


3. 이런 사고를 당하고 나서 스카이폴 저택으로 가서 나홀로 집에를 찍는 부분에서는 한층 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M이 다른 사람들은 끌어들이지 말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대략 정신이 멍해졌고요. 일단 '유인해야지!'라고 여기로 가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래요, 전장을 자신들이 원하는 지점으로 바꾸는 것까진 좋다고 쳐요. 그런데 적들의 이동경로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었으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이쪽 인원을 투입해야죠. 해킹신 실바에게 눈치채일까봐? 어이쿠. 아니, 저놈들은 차로 용병부대 투입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헬기까지 동원하는데? 저놈들이 헬기를 동원해도 MI6를 비롯한 영국 전체가 모르고 있고 이쪽은 아무것도 못해요? 도주경로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조작할 수는 있으면서? 이럴 거면 왜 거기로 간 건데?


이런 이유로 스토리는 보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마치 TV 드라마에서 마지막에 남녀 둘 중에 하나가 의미없이 갑자기 떠나버리는데, 납득 가는 이유는 없고 '그냥 그게 멋있으니까' 그러는 걸 보는 기분이에요.


사실 캐릭터도 불만이 많은데, 실바는 마치 '다크 나이트'의 조커 짝퉁을 만들려다가 찌질하게 망한 걸로 보였습니다. 샘 멘데스가 '다크 나이트'를 많이 의식한 것 같은데 그게 영화 전체에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 것 같지는 않아요. 원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설득력은 어디로 던져두고 무리수를 두는 것이나, 실바의 캐릭터로 보나. 영화 속에서 M과 본드와 실바의 관계는 무슨 막장 사이코 가족드라마 같은데, 실바의 설정 자체는 로망이 있어서(본드 이전에 조직의 에이스, 배신자,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수장 M에게 배신당한 자) 본드와 대립각을 좀 더 첨예하게 세우는 멋진 캐릭터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은 그냥... (먼 산)


결과적으로 이성으로 본 부분은 납득이 안가서 피식거렸고 감성적으로 즐기는 부분은 무척 좋았던 영화입니다. 이 정도로 양자를 분리해서 만족감이 극단에서 논 것도 참 신기한 경험이었죠. 좋아하는 사람은 무척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싫어하는게 그런 이유인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진짜 문제는 이 영화가 그렇게 감성으로만 즐기기에 현실적으로, 이성적으로 보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부분들을 많이 넣어두고 있다는 점 같기도 합니다. '요즘 시대에 과연 스파이 조직이 필요한가?'라는 의문만 봐도 그렇지만,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가 된 이후로 이 시리즈는 좀 더 피가 튀고 현실스러운 색채가 강해졌으니까요. 제가 별로 좋아하진 않았던 옛날 본드처럼 훨씬 낭만적인 분위기였다면 아마 스토리가 어떻게 굴러가건 신경 쓰지 않고 봤을지도 모릅니다.




덧글

  • 계란소년 2012/11/03 21:05 # 답글

    그렇게 이성으로 접근해서 납득이 가는 스타일의 영화는 아닌 듯요. 오마쥬로 넘쳐나는 것도 그러하고...
  • 로오나 2012/11/03 21:10 #

    뭐 그래서 이성으로 본 부분은 납득이 안가서 피식거렸고 감성적으로 즐기는 부분은 재미있게 본 거죠. 전 재미있게는 봤습니다. 이 정도로 양자를 분리해서 만족감이 극단에서 논 것도 참 신기한 경험이었죠. 호평으로 많이 기울긴 했지만 또 싫어하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싫어하는게 그런 이유인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문제는 이 영화가 그렇게 감성으로만 즐기기에 현실적으로, 이성적으로 보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부분들을 많이 넣어두고 있다는 점인지도 모르죠. 다니엘 크레이그 이후로 본드는 좀 더 피가 튀고 현실스러운 색채가 강해졌으니까요. 제가 별로 좋아하진 않았던 옛날 본드처럼 훨씬 낭만적인 분위기였다면 아마 이런 식의 해석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 로오나 2012/11/03 21:14 #

    쓰고 보니 본문에 추가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추가.
  • Uglycat 2012/11/03 21:11 # 답글

    이 작품에 대한 주변 분들의 평을 보면 비평가들이 과대평가를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 로오나 2012/11/03 21:15 #

    좋아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아요. 그런데 영화가 클래식의 추억을 가진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부분과 별개로 이성적으로 봐야 할 부분에서 허점을 많이 보이는데 이런 부분은 별개로 평해야할 것 같더군요. 다니엘 크레이그 본드의 세계는 별로 낭만적이지 않은데, 낭만적으로 봐야만 허용 가능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지라...
  • 마봉길 2012/11/03 21:17 # 답글

    샘 멘데스를 담기엔 007 시리즈라는 그릇이 너무 작은 건지...
  • 로오나 2012/11/03 21:20 #

    제가 보기엔 반대 같습니다. 007을 연출하기에 샘 멘데스는 너무 다크나이트 빠심이 강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만든 영화도 제법 근사하다는게 흥미로운 점이고.
  • 잠본이 2012/11/03 21:30 # 답글

    "개연성은 안드로메다로 관광 보냈습니다"

    감성과 이성을 분리하고 봐야 제 모습이 보인다는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근데 진짜 실바의 취급은 답이 없어서...
  • 로오나 2012/11/04 07:33 #

    실바 부분은 너무 조커 짝퉁을 만들려고 발악을 하다 픽 쓰러지는구나... 란 느낌밖에는-_-;
  • RuBisCO 2012/11/03 21:35 # 답글

    그럼 관점에서 생각해보니 2번은 자초한 사태이기도 하군요. 그리고 결과 역시 그렇게 되었고. 스포일러라 직접 언급은 못하겠지만 돌려 생각해보면 사필귀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듯 합니다.
  • 로오나 2012/11/04 07:34 #

    MI6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주장하는 듯한 부분이었죠.
  • 남선북마 2012/11/03 21:41 # 답글

    감독이 넣고싶은 특정장면을 만들기위해 플롯을 억지로 우겨넣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시리즈라는것은 놔두고 이영화자체로만 봐도 완성도는 그렇게 높지않아 보여요..
  • 로오나 2012/11/04 07:34 #

    시리즈라는 건 별로 고려의 대상이 못됩니다. 연계성이 별로 없으니...
  • 창천 2012/11/03 21:47 # 답글

    007 시리즈가 벌써 50년이나 되었군요.
    제임스 본드 역이 피어스 브로스넌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로 바뀐 뒤로는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네요. 이번 기회에 보러 가야겠습니다.
  • 로오나 2012/11/04 07:35 #

    피어스 브로스넌은 참 능글맞은 007의 이미지 그대로였죠. 그 시리즈는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 에뤼엘 2012/11/04 02:23 # 답글

    개인적으로 오프닝 크레딧만으로 돈 만원값했다고 생각합니다.
    오프닝이 너무 강렬함..
  • 로오나 2012/11/04 07:35 #

    오프닝 시퀀스는 확실히 근사했습니다.
  • rumic71 2012/11/04 09:22 # 답글

    이 설명만으로 보면 영국이 아니라 한국 이야기 같군요.
  • 알트아이젠 2012/11/04 09:27 # 답글

    저는 후반부 스카이폴 저택에서의 전투가 다소 늘어진걸 제외하면 만족스럽게 봤는데, 이 포스팅을 보니까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그래도 다시 등장한 Q와 머니페니, 말씀하신대로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생각났지만 실바라는 캐릭터는 반갑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 朝霧達哉 2012/11/04 10:57 # 답글

    스카이폴은 '그분'의 명예로운 퇴장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같은 느낌을 지울수 없더군요.
  • SUTHERLAND 2012/11/04 12:02 # 답글

    "제임스 본드인데 살아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해! 그냥 살아나고 싶으니까 살아나는 거지! 나의 근사한 취미를 보고 열폭하라고! "

    이님 필력 쩌시넼ㅋㅋㅋㅋㅋㅋ
  • Adam 2012/11/04 12:03 # 삭제 답글

    하지만 저는 너무 지루해서 초기에는 졸았지요....역대 시리즈중에 제일 지루한 느낌을 받은 단순 관객 1인 입니다....
  • 2012/11/06 09:05 # 삭제 답글

    그럭저럭 재밌게 봤지만 이 포스팅엔 공감합니당 ㅎㅎㅎㅎ
    대체 스카이폴 저택에서 왜 셋만 덩그러니 남아서 버틴거냐며! 끝까지 전 누가 도와주러 올줄 알았어요-_-
    개인적으로 실바는 캐릭터성을 따지기 전에 하비에르 바르뎀이 무서워서 (...) 매력적인 악당은 아녔음
  • 충격 2012/11/09 07:01 # 답글

    같이 있던 여자가 구해준 건 맞을 겁니다.
    물에 빠진 뒤에 여자 손이 낚아채는 씬이 있죠.
    바로 뒤에 오프닝 시퀀스의 거대 손으로 이어지면서
    인상이 그쪽으로 흡수되고 잊혀지기 쉽... 지만 실은 있었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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