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퍼 - 조셉, 브루스, 그리고 피어스 가뇽



스포일러는 있습니다, 분명히.


본격 조셉 고든-레빗과 브루스 윌리스가 아웅다웅하는 시간여행 액션 영화 '루퍼'를 보고 왔습니다. 근데 분명히 저 두 사람을 보러 갔는데 보고 나서 이틀이 지난 지금, 제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한명의 꼬맹이였습니다. 영화속에서 '시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아역배우 피어스 가뇽이죠.


영화는 3천만 달러의 저예산이라는 티가 납니다. 액션은 별로 없고, 초능력 효과는 싼티가 나고, 영상도 별로 세련되거나 근사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2044년이라는 배경이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엄청나게 미래적이고 으리으리한 미래도시가 아니라, 시궁창에 가까운 소도시에 군데군데 미래적인 요소가 섞여있는 게 그럴싸한 겁니다. 약한 염동력으로 동전 놀리기나 하고 있는 돌연변이 초능력자들도 그 일부죠. 사실 중반부까지는 도대체 왜 굳이 시기를 2044년으로 설정하고 돌연변이들이 등장했어야 하는지 의아합니다. 시간이동 암살자라는 이상한 설정을 써먹는 건 근미래가 아니라 현대여도 괜찮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 알게 되죠. 아, 이래서였구나. 이래서 무리해서라도 시간대를 2044년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군.


조셉 고든-레빗은 뭔가 꿈이 있지만 쓰레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애송이를 잘 연기했고 브루스 윌리스는 익스펜더블 혹은 다이하드에서 출장 와서 악역 코스프레를 하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둘이 별로 닮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이미 진행되었던 미래'로 나아가는 동안에도 중간에 머리가 벗겨지면서 브루스 윌리스가 되었을 때(...)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게 아니라 중간을 건너뛴 것 같거든요. 하지만 거긴 웃기니까 됐고. (...) 그리고 조셉 고든-레빗이 중간에 머리 벗겨지는 걸 신경 쓰는 부분들이 있는데 왠지 이마가 넓다 보니 실제로 벗겨질 것 같아서 어울리긴 합니다. 닮진 않았지만 머리는 벗겨질 것 같은... 왠지 조셉 고든-레빗한테 굉장히 미안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넘어가고.

실망스러운 건 실제로 이 둘이 얽히는 부분은 별로 없다는 겁니다. 둘이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잠깐 싸우기도 하지만, 그 후에는 따로따로 놀면서 자기 할일을 해요. 영화가 조셉 고든-레빗이 세라의 농장으로 기어들어간 후로는 구성이 좀 늘어집니다. 좀 더 피튀기게 싸우다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도 하다가, 그러다가 힘을 합쳐 싸우기도 하면서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는 뭐 그런걸 기대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액션은 브루스 윌리스가 실로 그다운 포스로 다 해먹으면서 조직을 전멸시키고 그동안 조셉 고든-레빗은 농장의 싱글맘과 멜로 드라마를 찍고 있어요. 30년 전으로 온 브루스 윌리스가 30년 전의 자신이 기억에도 없는 새로운 흑역사를 실시간으로 갱신하는걸 보면서 괴로워하는건 제법 깨알 같은 재미가 있었지만 그럼 30년 전의 자신이 똑같은 쓰레기 인생을 살지 않도록 도와주는 멘토가 되어줄 수도 있었을텐데, 그런 맛은 전혀 없더군요. 좀 더 둘이 자주 보고 많이 아웅다웅했으면 영화가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것처럼 영화는 시간이동과 타임 패러독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나 자세한 설명 따윈 하지 않습니다. 사실 앞뒤도 안맞는 구석이 밑도 끝도 없이 나오지만 그건 시간여행 영화의 숙명 같은 것이고 작중에서도 '그런건 떠들다 보면 한도 끝도 없으니 치워두자'는 쿨한 태도를 보여줘요. 그래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있었는데 영화 내적으로 반드시 설명되었어야 할 부분이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 보고 나서 남은 의문은 두 가지입니다.


1. 시드 엄마는 어떻게 루퍼를 알고 있나? 루퍼의 존재가 공공연한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설명이 되었어야 했다.

2. 왜 루퍼 조직은 미래에서 온 인물이 죽지 않고 도망쳤을 때 과거의 동일인물을 곧바로 죽이지 않고 생포하는가? 생포한 뒤에 굳이 잔혹한 짓을 해서 미래의 인물을 불러들이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시드 엄마가 루퍼를 아는 건, 뭐 그렇다고 쳐요. 어쩌면 소년만화잡지에 10년 4개월 동안 연재되고도 충분할 정도로 장대하지만 연재 10주만에 조기종결당할 정도로 재미없는 과거사가 있는데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버린 거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왜 미래의 인물을 없애야 할 때 굳이 과거의 인물을 생포하는지는 미스터리어스합니다. 작중에서 설명이 안 되는 것도 문제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도 그래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중간의 연출은 호러블하긴 했지만, 무의미하게 보여요. 현재의 조를 쫓다가 쏘려고 하자 '생포해야 한다'고 그것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법칙처럼 말하는데, 그냥 쏴서 죽이면 되잖아? 어차피 과거를 죽이면 미래도 없어지는데? 시체 처리라던가 기타등등의 문제가 있다면 모르겠는데, 과거의 인물이 죽으면 미래의 인물은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립니다. 마지막을 보면 알 수 있죠.


어쨌거나 다 보고 나서 제 기억 속에 가장 강하게 남은 인물은 시드였습니다. 호러 영화 보면 애들이 무섭게 나오는 경우는 흔하죠. 분위기나 조명 등을 이용해서 애들이 그냥 그곳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거. 이 작품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드를 연기한 꼬맹이 배우 피어스 가뇽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요. 이 꼬맹이가 폭주할 때 표정에서 드러나는 포스가 완전 쩔어! '존재하지 않게 된 미래' 속에서 기차에 타고 있을 때의 표정도 인상 깊었고, 특히 마지막에 총알 스쳐서 쓰러지고 나서 일어날 때 절대강자의 포스를 풍기면서 브루스 윌리스를 노려볼 때의 표정이 아주 그냥...!

과연 장래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할 수퍼 빌런이 될 꼬맹이다운 포스입니다. 피어스 가뇽은 장래가 기대되는군요. 왠지 보고 나니 시드를 중심으로 진짜 터미네이터스러운 내용을 찍었어도 좋았을 것 같아요. 차라리 루퍼니 뭐니 이런거 때려치고 조셉 고든-레빗이 미래의 자신으로부터 시드를 지키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레인메이커 비긴즈로요.



P.S. - 그러고보니 개인적으로 영화 속에서 가장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부분은 시간이동도, 염동력도 아니었습니다. 금괴랑 은괴였어요. 아니, 금괴랑 은괴가 저만큼이면 도대체 얼마야? 솔직히 브루스 윌리스가 미래에 뭔짓을 했길래 그 돈을 다 쓸 수 있었는지 상상이 안가요.







덧글

  • unHDguy 2012/10/26 20:50 # 답글

    정말 잼나고....
    모 화끈한 액션이 있는것도 아니지만요...

    잼난데....근데 사람들에게외면받고 있어요.ㅜㅜ
    그게 좀 안타까움.
  • 벨제브브 2012/10/26 21:07 # 답글

    금괴랑 은괴를 현찰화 하면서 수수료로 많이 뜯겨서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큰 돈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아님 미래엔 금이랑 은이 너무 흔한 소재라던가...?
  • 로오나 2012/10/26 22:04 #

    뭐 그냥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불태운 돈처럼 현실에서의 가치를 염두에 안두고 내보낸 것뿐이라고 생각하지만요.
  • 창천 2012/10/26 21:43 # 답글

    흠.. 제 입장에서는 설정은 재밌는데 영화 자체는 끌리지 않는 작품이랄까요[...]
  • 마봉길 2012/10/26 21:49 # 답글

    미래에서 현재로 온 인물을 죽이기 전에 현재로 온 인물을 죽이면 그가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사건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셈이니, 그거야 말로 타임패러독스에 딱 걸리는 문제가 되서가 아니겠습니까?
    작중에서 나오지만, 현재 인물의 행위에 따라 미래 인물의 기억도 바뀌는 걸 고려하면, 그때 도망친 미래의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마도 조직은 현재의 그를 그 시대의 척부인으로 만들지언정 결코 죽이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합닌다. 미래의 그는 어찌됐든 과거로 돌아가서 거기서 죽어야 하니까요.
    그 신을 봐서 아시겠지만, 지정된 장소로 돌아갈 때 '그'의 30년은 도망가기 전의 30년과는 달리 지옥 그 자체였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그런식의 적절한(?) 처벌은 이미 운명이 결정된 다른 루퍼들에게 귀감(?)도 되고...
  • 로오나 2012/10/26 22:10 #

    이 영화에는 이미 너무 많은 타임 패러독스가 존재하고 그런 식으로 납득하기에는 마지막이 너무 깔끔하게 끝나버립니다. 그리 되었다면 미래의 조가 죽은 시점에서 금괴를 끌고 온 차량도 사라지고 죽은 자들은 다 살아나야 하지 않나, 까지 따져볼 수 있겠죠. 게다가 와서 미래가 바뀌는 순간부터 과거가 덧칠되며 자신의 기억이 '가능성'이 되어버린다고 하는데, 그렇게 타임 패러독스를 꼼꼼하게 따져보자면 그것조차도 별로 납득 가는 설명은 아닐 겁니다.

    어쨌거나 부실한 설명이나마 영화 속에서 '이유는 이거다'라고 말해줬더라면, 그 대답을 주워들고 만족했을 겁니다. 문제는 영화 속에서 반드시 던져줬어야 할 그 이유를 안던져준다는 거죠.
  • ... 2012/10/26 22:34 # 삭제 답글

    ...주인공은 그냥 미래를 봤다고 가오잡지 말고 결정적 순간에 좀 깊이 생각해 봤더라면 좋았을 것 같은데.

    그... 브루스 윌리스가 총들고 있는 팔이 오른쪽이면
    주인공도 자기 오른손만 쏴서 손병신을 만들면 됐을 일 아닌가

    메데타시 메데타시

  • 로오나 2012/10/26 22:38 #

    처, 천재...!

    근데 별로 머리가 좋아보이진 않았어요. (...)
  • 무한루프 2012/10/26 23:18 # 삭제

    하지만 브루스 윌리스가 오기로라도 남은 손으로 총을 들고 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영화상에서도 나왔다시피, 미래에서 온 사람은 현재(과거)의 자신이 상처를 입어도, 피를 흘리는 게 아니라 이미 흉터가 지고 아문 상태가 되지요.
    그렇게 되면 주인공은 무지막지한 고통에 출혈까지 겪어야 하고, 하나 남은 왼손으로 왼손을 제거할 순 없잖겠어요. 미래의 자신을 저지할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지는....
    ;ㅁ;
  • 유나씨 2012/10/27 00:18 # 답글

    ...약쟁이로 살고 있으니 돈이 녹아나지..[......]
    그나저나 이걸로 브루스 윌리스는 타임패러독스 영화에 2번 출연했고나.. 이전작은 12마리 원숭이..
  • 로오나 2012/10/28 19:22 #

    그걸 감안해도... 저 은괴의 양은;;;
  • Uglycat 2012/10/27 05:43 # 답글

    확실히 첫번째 의문점은 신경 쓰이는 바...
    그보다 사실 이 작품은 복수심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작품인 건지도...
  • 2012/10/27 14:12 # 삭제 답글

    뭐 돈이야 주식 투자 몇번 잘못하면 금괴건 은괴건 훅 가버리겠죠 (-_ㅜ)..... 여튼 저도 궁금했어요! 왜 새라는 루퍼의존재를 아는건가요...시드 아빠가 루퍼였을 가능성이 있다고맥거핀을 던지는거 같은데 그래서 뭐? 딱히 있으나 없으나 쓸모 있는 설정은 아닌거 같아요.

    사실 제일 의문인건 루퍼라는 직업의 필요성이예요. 미래사회에선 시체가 일일이 태깅 돼서 시체처리가 힘들다는 설정도 심하게 억지지만, 만약 과거로 보내서 시체를 처리하고 싶으면 그많은 루퍼를 고용하지 말고 걍 과거의 용광로(루퍼들이 시체 처리하던)에 타임터널 뚫고 시체 보내면 그만이지요.터미네이터도 아닌 이상 거기서 살아나올리가..
  • 로오나 2012/10/28 19:22 #

    뭐 그냥 전제 자체가 따지다 보면 뻘타에요. 그런건 관대하게 봐줘야죠.
  • 나그네 2013/03/24 08:06 # 삭제 답글

    저는 어제 이 영화를 봤는데요,
    진짜 맥거핀은
    '시드가 자기의 이모(새라의 언니)를 친엄마로 믿는 것처럼 낚시질을 해서
    시드가 이미 친엄마의 죽음을 겪었기에 마치 조가 죽이지 않으면 이미 레인메이커가 될 것'처럼 만들어놓은 거 같아요.
    하지만 미래의 조가 죽이러 오지 않으면 시드는 새라를 잃을 일이 없기 때문에 레인메이커가 되지 않을텐데
    미래의 조는 30년 후 미래에서 레인메이커의 루퍼 처형으로 인해 그렇게 끌려온 거죠.
    물론 미래의 조가 순순히 죽는 게 처음에 나온 게 아니라, 현재의 조가 미래의 조한테 습격당한 장면이 먼저 나오긴 하지만,
    그렇게 30년을 또 보내고 두건 쓴 미래의 조가 현재로 다시 순순히 보내져서 죽음당한 후에
    현재의 조는 다시 30년을 상하이에서 살고, 아내가 죽자 이번엔 현재의 조를 습격하는 미래의 조로
    보내졌단 말인가?
    암튼 미래의 조만 새라를 죽이지 않았으면 어차피 시드도 레인메이커가 될만큼 복수심에 불타진 않단 거죠.
    볼 땐 잘 몰랐는데, 지나고보니 정말 전제 자체가 뻘타...
    그래도 아역은 정말 매력적 @_@
  • 나그네 2013/04/04 10:40 # 삭제 답글

    두번째 질문에 대한 내용입니다.
    현재의 루퍼를 죽이면 미래의 루퍼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번거롭게 현재 루퍼의 사지를 절단할 필요 없이 죽여버리면 된다.
    네,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우리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 속의 인물들이 이런 전지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알고 행동하지는 않죠.
    결론적으로 "그들은 현재의 루퍼를 죽이면 미래의 루퍼가 어떻게 될지 모르고 있다." 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재의 조가 그 자신의 팔뚝에 상해를 입힘으로 미래의 자신을 불러들이는 장면이
    등장함에 따라 위에서 말한 그들이 모른다는 가설은 무효화 되겠죠.
    그들은 현재의 루퍼에게 위해를 가하면 미래의 루퍼에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거죠.
    알고 있다 해도 미래의 루퍼가 현재의 루퍼를 죽이기까지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현재의 루퍼에게 위해를 가함으로 미래의 루퍼를 끌어들여 확인사살을 하고 싶어하겠죠. 하지만 이 또한 가설 일 뿐.
    어찌 됐건 모든 사건에 반드시 논리적인 인과관계가 형성되고 사람들이 모든 결정을 합리적인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것은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니까, 영화에서도 그런 논리적인 행동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기대인거죠. ㅎㅎㅎ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2017 대표이글루_mo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