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The Lord of the Rings' 번역본들


재미있게도 피터 잭슨 아저씨가 '호빗'의 촬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린 바로 어제, 나는 반쯤 창고로 쓰고 있는 집 서재에서 내가 아는 한 가장 오래된 'The Lord of the Rings' 번역본을 찾아냈다. 초등학교 때(당시에는 국민학교였다) 산 도서전집 ACE88 에 같이 들어있던 버전이 바로 그것이다.


ACE88 속의 'The Lord of the Rings'는 총 여섯권이었으며 '반지 이야기'라는 시리즈 명칭으로 불렸다. 각권마다 '머나먼~' 형식의 제목이 붙어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중 3, 4권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1, 2, 5, 6권만에 서재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사실 버리지 않고 남겨놓았다는 게 더 놀랍기는 하다. 내가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이 전집들은 죄다 친척 동생들에게로 건너갔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쨌거나 프리퀄이며 피터 잭슨 아저씨가 열심히 영화화 중인 '호빗'의 경우에는 '호비트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반지 이야기' 시리즈와 딱히 연결지어놓지는 않았지만 전집 넘버가 바로 전에 위치해 있어서 전집을 1번부터 순서대로 읽을 경우 자연스럽게 '호비트 모험'을 읽고 나서 '반지 이야기' 여섯권을 읽게 구성되어 있었다. 물론 당시의 나는 그딴 넘버링은 관심이 없었고 읽고 싶은대로 뽑아서 읽곤 했는데, 이 책들을 별로 재미있게 읽지는 않았다. 특히 '호비트 모험'은 어린 나에게는 신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굉장히 지루한 책이었다. 사실 '반지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페이지당 28줄이나 들어가 있었는데 자간이 커서 그런가, 별로 빽빽해 보이진 않는다. 근데 솔직히 가독성은 꽝이었다. 애들 보는 책이면 이런 것도 신경 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생각해보니 옛날 전집류 치고 완전 그림책이 아니고서야 가독성 좋은 편집 따위 없었던 것 같다. 이래놓고 애들이 책을 안읽느니 하면서 투덜거리다니,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시절이었군.


뒤를 보면 1988년 출간이었고, 몇판 몇쇄인지 따윈 나와있지 않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이 책을 샀으니 딱 그때 애들에게 팔아먹기 위해 찍어낸 책이었던 모양이다. 자그마치 24년 전의 책이다. 물론 정식 라이센스 따윈 맺지 않았겠지. 고려원의 해적판 무협소설들이 TV 광고를 하면서 수백만부가 팔리던 시절이었는걸.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은 매권마다 컬러 일러스트가 4페이지씩 들어가 있었다는 점이다. 동화풍의 컬러 일러스트 4페이지는 아무리 봐도 라이트노벨의 형식을 떠올리게 하는데, '반지 이야기'라는 제목도 그렇고(편견이겠지만 이야기 -> 모노가타리가 떠올라서. 상관없지만 내가 이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슈퍼 패미컴용 RPG '대패수 이야기'가 계기였다) 아무래도 일본어판을 중역한 버전이 아니었을까 의심된다.



예문판 '반지전쟁'은 내가 아는 한 두 번째로 오래된 'The Lord of the Rings' 번역본이다. 어째서 제목이 '반지전쟁'으로 왜곡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이 버전은 꽤 오랫동안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The Lord of the Rings' 번역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것 역시 정식 라이센스 따윈 안맺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어쨌거나 책이 지금 봐도 그럴싸해보이긴 한다. 이 책은 페이지당 무려 31줄이 들어가 있었고 글씨도 작아서 정말 빽빽해보였다. 이걸 보니 ACE88 의 편집은 당시 기준으로는 충분히 아이들을 배려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내가 이 책을 다 읽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재미있고 없고를 떠나서 참 읽기 힘들더라. 지금 펼쳐보니 아예 읽을 엄두가 안난다.


초판 발행일은 1990년. ACE88과 2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내가 산 건 1997년 발행본이긴 하지만 그래도 벌써 15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황금가지판 '반지의 제왕'. 피터 잭슨 아저씨의 영화가 개봉할 당시에 맞춰서 나온 정식 완역판이었다. 내가 아는 한 최초의 정식 라이센스 버전이었다. 'The Lord of the Rings'를 '반지의 제왕'으로 번역하는 것에는 PC 통신상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상당히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반지의 제왕'이 입에 달라붙어서 익숙해졌지만 당시엔 엄청 어색했다. 개인적으로는 당시 제시됐던 후보들 중에서는 '반지의 군주'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물론 이제와서는 의미없는 이야기고, 나는 딱히 톨킨의 작품에 애정을 불태우는 팬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주제의 논쟁에는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그외에도 이 버전은 번역 때문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원'이라던가 '그닥'이라던가...


이 버전도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빽빽한 편이었다. 페이지당 27줄이나 들어가 있었으니까. 물론 오래된 두 판본에 비하면 여백이 많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난 개인적으로 이 버전을 싫어하는데, 그건 번역 때문이다. 번역을 이유로 들 경우 팬이라면 용어의 번역 문제나 혹은 오역을 이야기하겠지만 내 경우는 그건 아니다. 단 한 가지, '그닥'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이 버전은 '그다지'를 모조리 '그닥'으로 썼고 덕분에 나는 이 버전을 다 읽는데 2년이 넘게 걸렸다. 한번 읽은 후에는 다시는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없이 그저 책장을 장식해두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니 참 무의미하게 느껴지는데 언젠가 'The Lord of the Rings'를 읽고 싶어하는 누군가에게 물려줄지도 모르지.



'반지의 제왕'은 2001년에 초판본이 발행되었다. 해적판 두 버전이 20세기에 나온데 비해 정식 라이센스판이 무려 21세기에 나온걸 보니 참...



팬이 아니라고 말하는 내가 'The Lord of the Rings' 번역본을 세 가지 버전으로 열세 권이나 갖고 있는 것도 좀 웃기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역시 ACE88 버전의 3, 4권이 유실된 것은 추억의 일부가 찢겨져 나간 채 돌아온 것 같아서 많이 아쉽다.







덧글

  • 링고 2012/07/07 10:09 # 답글

    그래도 동서문화사 책들은 당시에는 최고의 읽을꺼리였었지요.
    저 무식한 자간을 이렇게 다시 보니 또 다시 책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 RegTeddy 2012/07/07 10:34 # 삭제 답글

    아.. 동서문화사 호비트 모험은 국딩시절 이동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근데, 제가 읽은건 파란 표지였던 것 같은데.. 추억의 동서문화사.. 동서문화사는 삼국지가 대박이었는데... 허문순이 작가로 되어있었으나 아마 이것도 번역 이겠죠? 오두미도의 순례자 두명이 등장하고, 뒤에는 부록으로 삼국지 처세술이 나와있었던...
  • 地上光輝 2012/07/07 10:54 # 답글

    에이스 버전은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 세지 2012/07/07 11:00 # 답글

    예문판으로 처음 접한 1인.
    그전에도 번역본이 있긴있었다는게 놀랍네요.
    황금가지 판은 저도 샀는데
    요새 나온건 번역이 또 달라서 사고 싶어지더군요.
  • 잠본이 2012/07/07 11:24 # 답글

    중역본 맞을 겁니다. 일본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반지이야기'로 통하죠.
  • Frey 2012/07/07 13:31 # 답글

    저도 저 ACE88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새 없어졌더라고요. 참 아쉬웠죠...
  • 2012/07/07 13:3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천일 2012/07/07 13:38 # 삭제 답글

    일본어판 반지의 제왕 제목이 指輪物語(유비와모노가타리)니 반지이야기면 일본어판 중역버전이 맞을겁니다.
  • 해츨링아린 2012/07/07 14:35 # 답글

    ace 시리즈 저희 집에도 있어요 -ㅂ-)!
  • 다물 2012/07/07 15:04 # 답글

    The Lord of the Rings 팬이시군요. 강한 부정은 긍정이니까요.
    영화보고 재미있어서 황금가지판 1권 샀었는데, 문체가 재미없더라고요. 마치 옛날 고지식한 책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 파란태풍 2012/07/07 15:19 # 답글

    고대유물을 보유하고 계시다니, 부럽군요.
  • rumic71 2012/07/07 17:50 # 답글

    저도 예문판으로 읽었습니다. 정식버젼도 예문판 번역자들이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만...
  • 유월 2012/07/07 20:26 # 답글

    저도 예문판으로 읽었죠. 번역이 제법 괜찮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 호앵 2012/07/07 22:17 # 답글

    저희 집에도 반지전쟁이 있어서 봤었지요... 아무리그래도 노래부르는 파트를 다 읽기는 어렵더군요 ;ㅅ;

    그나저나 '그닥' 이라니.. 대박이네요 (-_-)
  • rumic71 2012/07/08 15:57 #

    80년대 한국문학에서 '그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FlakGear 2012/07/07 23:09 # 답글

    스메어골에 주목해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창천 2012/07/08 00:01 # 답글

    반지의 제왕 정식완역본 이전의 책들이라니.. 거의 유물이군요.
  • hogh 2012/07/08 00:09 # 답글

    저는 씨앗판, 예문판, 일어 중역판, 황금가지판 이렇게 있네요. 에이스느 ㄴ아니지만요
  • Uglycat 2012/07/08 00:36 # 답글

    전 정식완역본만 소장하고 있는데, 돌아보니까 벌써 10년이...
  • 폐묘 2012/07/08 02:10 # 답글

    제가 읽었던 건 3권짜리였는데 어릴적이어서 좀 힘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영화볼 때 쯤엔 기억이 인물이름 정도 외엔 기억을 하나도 못했던 게 개그.
  • 아이리프 2012/07/09 10:35 # 삭제 답글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14449
    성바오로출판사의 마술반지... 도 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4학년때 쯤 접했으니.. 한 92년도?
    1,2권밖에 못 보아선... 프로도와 샘만 따로 여행을 떠나는 시점까지 밖엔 못 봤었습니다..
    저 책은 다들 모르더라고요.. 호비트의 모험.. 으로 해서 '호빗'도 성바오로출판사에서 출판된 적이 있고요..
    나니아 연대기도 저 출판사의 책으로 몇권을 봤었습니다..
  • 키르난 2012/07/10 09:39 # 답글

    98년 즈음인가, 나우누리 환타지아에서 반지의 제왕 번역에 대한 지적글이 올라온 적 있는데, 그 대상이 중간책인줄 알았더니 ACE판이더군요. 여왕개미 운운하던 장면이 거기에 실려 있어서...-ㅂ-; ACE판은 저도 전권 다 가지고 있는데 아직 못치우겠습니다. 서가 부피를 잔뜩 잡아 먹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몇몇 판타지 때문에라도 못치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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