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 노장들의 총질은 간지날 수밖에 없다



처음 이 영화에 기대한 것은 '익스펜더블'에 이은 또 하나의 양민학살영화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브루스 윌리스와 모건 프리먼과 존 말코비치와 헬렌 미렌이 뭉쳐서 CIA를 때려부순다는데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실제로도 이 영화의 기본 포지션은 그렇습니다. 원래 전설이었지만 레전드인(?) 하지만 은퇴해서 조용히 살아가는 은거고수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드는 애송이 앞에서 요즘 애들은 모르는 진정한 포스를 선보이며 때려눕히는 것은 이 영화에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이죠. 하지만 의외로 적들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익스펜더블'에서는 도대체 쟤네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분들한테 이렇게 두들겨맞고 저렇게 참혹한 꼴을 당해야 하는지 눈에서 땀이 날 지경이었는데 CIA는 제법 한가닥해요. 역시 최근 헐리웃 영화에서 까려면 이놈들을 까야 한다는 트렌드가 성립되고 있는 조직답습니다. 무수한 주인공 파티에게 두들겨맞으며 연마된 기량은 그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군요.(...)


게다가 CIA 측에서도 제법 괜찮은 캐릭터를 대립각으로 내세운 게 좋았습니다. 요즘 잘 나가는 야심찬 젊은 친구 윌리엄 쿠퍼가 선배님과 아웅다웅해주는 구도는 꽤 로망이 있잖아요. 실력도 있고, 비뚤어진 조직 속에서 나름 올바른 마인드를 갖고 있고. 이 캐릭터를 연기한 칼 어번은 처음 봤을 때부터 '어, 이 양반 어디서 봤었지?'라고 생각했는데 '스타트렉 : 더 비기닝' 닥터 레나드 본즈 맥코이를 연기했고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에오메르를 연기한 양반이더군요. 인상이 꽤 강렬한 편이라서 다른데서 봤으면 잊었을 리가 없을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역시나.


브루스 윌리스는 그렇다 치고, 이 영화에서 의외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헬렌 미렌이었습니다. 레전드 노인들이 스타일리쉬하게 총질하면 폭풍간지가 몰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아, 할머니의 총질은 왜 이렇게 멋있는 건가요? 사실 만화 '꼭두각시 서커스' 때부터 전 할머니 총질에 반해있었죠. 분명히 또 어딘가에 멋지게 총질하는 할머니가 있었을텐데 당장 기억나진 않고. 어쨌든 저격수 모드로 들어갔을 때도, 그리고 주차장에서 대구경 기관총을 고정시켜놓고 꿈과 희망을 담아 미친듯이 땡겨줄 때도, 드레스 입고 당당하게 기관단총을 갈겨줄 때도 멋지군요. 게다가 국경도 신분도 적대관계도 초월한 쿨하고 하드보일드한 로맨스까지, 멋져요, 헬렌 미렌ㅠㅠ


기대를 많이 하고 갔다면 좀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는데, 머리 비우고 포스 있는 노장 배우들의 활약을 즐기러 가면 딱 좋아요. 액션은 예고편에서도 나온, 스핀하는 경찰차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여유있게 걸어나오면서 총질을 하는 부분을 비롯해서 대놓고 뻔뻔한 연출이 많은데 이게 꽤 멋진데다 웃기기까지 한 편이고, 그외에도 소소하게 웃겨주는 잔재미들이 꽤 많이 포진해있어서 좋았습니다. 특히 엔딩 직후에 나오는 에필로그는 빵 터졌죠.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만빵.



헬렌 미렌을 찬양해두긴 했지만 사실 작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역시 윌리엄 쿠퍼였습니다. 아직 기량도 경험도 부족한 젊은이지만 조직의 힘을 이용해서 필사적으로 노장들과 맞서고, 그런 와중에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이 의미심장했던 캐릭터죠. 사실 초반부터 진지하게 싸우다가 개그스러운 상황에 마주하게 되는 그의 존재가 없었다면 '레드'는 좀 많이 재미없는 영화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영화가 굉장히 몰입감 높고 만족감이 탁월한 영화는 아니었거든요. 기왕 할 거면 좀 더 신나게 때려부수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 해서. 그런 의미에서 윌리엄 쿠퍼의 마지막은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안나올 것 같지만 혹시 속편이 나오게 된다면 그도 다시 좀 더 성장한 모습으로 나와줬으면 합니다.


사실 전 히로인 새라를 처음에는 브루스 윌리스의 딸인줄 알았습니다.(...) 근데 연인관계로 가버리는군요. 그렇구나. 비정한 은거고수에게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라는 컨셉이라니. 하긴 새라를 연기한 메리-루이스 파커도 나이가 좀 있는 배우니까 뭐 그럭저럭. 그녀는 왠지 앤 해서웨이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경력을 찾아보니 다른데서 본 적은 없었음. 출연경력은 꽤 많은 배우인데 우째 출연작들이 죄다 저랑은 인연이 없더라고요^^;


CIA 기밀문고 저장소를 관리하는 아저씨도 어디서 많이 본 배우였는데 어디서 본 배우였는지는 생각이 안나더군요. 사실 제가 배우 얼굴이랑 이름 기억하는데는 별로 재능이 없는 편이에요. 찾아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 원.


존 말코비치의 경우에는 중간에 트레일러들이 많은 곳에서 CIA 요원들과 치고받는 부분들이 가장 빛나지 않았나 싶군요. 특히 RPG를 장비한 아줌마와 서부극스러운 분위기를 내면서 카운터를 먹여주는 장면은 최고. 그외에는 헬렌 미렌이 자기를 놔두고 가라고 할 때의 표정연기가 정말 적절했던 느낌이고.


모건 프리먼은 솔직히 가장 안습한 포지션이었습니다. 죽을 때 더 간지나게 연출이라도 좀 해주지 그렇게 쿨하게 넘겨버리다니ㅠㅠ 처음부터 간암 말기라는 설정이었으니 희생하기에는 가장 좋은 포지션이긴 했지만서도. 투덜투덜.


마지막 에필로그는 정말 빵 터졌습니다. 원래 이거 히든 씬으로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은 성격의 장면이었는데, 뭐, 엔딩 직후에 떠줘서 기다리는 수고는 덜었죠. 실은 혹시나 그래도 뭐 있지 않을까 싶어서 스탭롤을 끝까지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는 슬픈 기다림의 전설.








덧글

  • 怪人 2010/11/11 13:36 # 답글

    만화 <R.E.D> 기대하고 왔다면 낚인 건가요.. (퍼덕퍼덕?)
  • 로오나 2010/11/11 13:37 #

    영화 밸리에 올렸는걸요.(...) 뭐 이것도 마블 코믹스 원작이긴 하지만.
  • Skullist 2010/11/11 13:47 # 답글

    모건영감님은 신노릇도 하고 총질도 하고...

    마음엔 뭘하시려나....ㄱ-
  • 로오나 2010/11/11 13:49 #

    대통령도 하셨죠. 이제 슬슬 슈퍼히어로도 한번...(어이)
  • Uglycat 2010/11/11 14:10 # 답글

    저 역시 그 마지막 부분에서 빵터졌더랬지요...
  • 로오나 2010/11/11 14:28 #

    거기 참 센스 좋았어요.
  • Peuple 2010/11/11 15:14 # 답글

    박격포를 장비한 아줌마는 '알라의 요술봉=7호 발사관=RPG-7'을 박격포로 잘못 쓰신 듯 합니다.
    실제로 그런 결투가 벌어졌다면, 러시아정품라면 탄두가 안터지고 끝났을테지만 중국제라면 터집니다.
    즉, CIA에 돈이 없어서 중국제를 질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응?)
  • 로오나 2010/11/11 15:20 #

    수정했습니다. 메이드 인 차이나였나요!?
  • Peuple 2010/11/11 15:57 #

    그게 발사위치에서 일정 거리가 지난 다음에 로켓모터가 점화되고, 탄두가 활성화됩니다.
    발사자의 안전을 위해서인데, 러시아 정품이나 천조국제(요즘에는 택티컬 로켓..이라면서
    이런저런 장비를 바른 RPG를 미국의 회사에서도 만듭니다.)라면 모를까 싼 맛에 대량구매
    해서 쓰는 중국제 탄두에 그런 안전장치를 돈들여서 달았을리가 없죠.
  • 2010/11/11 15:1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로오나 2010/11/11 15:21 #

    뭐 솔직히 기대 많이 하고 가면 실망할 영홥니다. 그냥 적당히 기대감 조절하고 봐야하는 영화죠.
  • 벨로린 2010/11/11 15:36 # 삭제 답글

    ... 문서고 할아버지는 아마 에어울프 부조종사 및 정비사...
  • 로오나 2010/11/11 20:48 #

    헉, 진짜요!?
  • 동굴아저씨 2010/11/11 15:44 # 답글

    응앜ㅋㅋㅋ
    레드를 봐야겠군요.
  • 내모선장 2010/11/11 17:58 # 답글

    윌리엄 쿠퍼 역의 배우인 칼 어번은 제가 기억하기론 본 슈프리머시에서 맷 데이먼의 여친을 죽이는 역으로 출연했습니다만, 반지의 제왕 역에서 에오미르라구요? 흐음... 그 배우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았는데요.
    문서고 담당 할아버지는 에어울프 초기에 부조종사 겸 정비사 역을 맡았던 어네스트 보그나인입니다. 과거에는 악역으로 유명했었는데 요샌 인상이 많이 바뀌셨군요. 전 저분이 이미 돌아가신 줄로 잘못 알고 있었다가 아직 활발하게 활동중이시라는 걸 알았기에 등장시에 더 벙쪘더라는...
  • 로오나 2010/11/11 20:50 #

    본 슈프리머시에도 나온 것은 맞습니다. 필모그래피에 반지의 제왕 에오메르가 있더군요.

    에어울프라니 정말 추억의 이름이군요. 인상좋아보이지만 왠지 과거에 한가닥하셨을 것 같은 할아버지의 이미지가 배우의 경력 그대로라니.(...)
  • 지나가던사람 2010/11/16 13:52 # 삭제

    에오메르 맞습니다 망한영화지만 둠에서도 나왔었죠
  • 나야꼴통 2010/11/11 18:02 # 답글

    경찰차 하차 총질은..... 꽤나 인상깊고.. 참으로 다시 보고 싶은 명장면인듯 하지만..
    왠지 어디선가 본듯한....

    그리고 .. 극중 브루스 윌리스 의 스펙 치곤 너무 못맞춘듯한.. ㅠ_ㅠ

    그래도 마지막 까지 유쾌하게 봤습니다.
  • 로오나 2010/11/11 20:50 #

    약간 늘어지는 면도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기대한 이미지는 들어가있는 영화였습니다. 소소하게 웃겨주는 부분들도 좋았고.
  • 흑염패아르 2010/11/11 21:11 # 답글

    아.... 마지막 엔딩씬 뭔가 하고 한참 생각했네요.
    작은 호의... 그거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로오나 2010/11/12 16:02 #

    날아드는 총탄을 피해 달리는 두 사람... 훗.(...)
  • 지나가던사람 2010/11/16 13:49 # 삭제 답글

    어네스트 보그나인 참 반가웠었죠...1917년생입니다 90이 넘은 노구(라기엔 너무나 정정한)를 이끌고 출연하셨죠
    근데 막상 영화에서 중요한 연결고리를 해주는 해결사같은 브라이언 콕스는 하는일에 비해 존재감이 너무 작아서 안습이었습니다
  • 로오나 2010/11/19 13:45 #

    헉, 연세가 그렇게 되셨나요? 대단하다.
  • 피치라임 2010/11/19 13:21 # 답글

    쿠퍼가 인상적이다 라는 말에 동의하고
    제 포스팅에도 그렇게 써 놓았지만...

    근데..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쟤..왜 저렇게 웃기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ㅎ
    이상하게 사람을 미소짓게 하던데..ㅋ
  • 로오나 2010/11/19 13:44 #

    귀엽지 않았나요?
  • 피치라임 2010/11/19 17:04 #

    흠..제가 느낀 그 감정(?)이 귀엽다는 것이었군요..

    전 존 말코비치가 더 귀여워서 그 생각을 못했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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