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과연 돈 많이 들인

뒤늦게 봤습니다. 원제는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정도 된다는데, 국내 제목에 대해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시는 분들도 종종 있던데 전 이러면 어떠랴 싶습니다. 솔직히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보다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훨씬 흥미로운 제목으로 보이거든요. 그리고 그걸 스포일링이라고 하기엔, 이미 영화의 시놉시스만 봐도 나오는 이야기의 전제조건이라서 알든 말든 상관도 없고.

2시간 40분의 러닝타임은 좀 길게 느껴졌습니다. 중간에는 시간이 느껴졌고 지루한 부분이 있었고 집중력이 끊어졌다가 다시 회복되는 부분이 있었지요. 20분 정도 쓸데없는 부분을 쳐내고 템포를 약간 빨리 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기복이 크고 드라마틱한 것과는 거리가 먼, 잔잔하고 평온한 이야기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하지만 화면은 굉장히 아름다웠습니다. 처음에 워너 브라더스의 로고가 뜨는 부분부터, 전 이 영화의 화면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요. 그리고 그 감상은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장면에 적용됩니다. 이 영화는 그 부분에서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순간도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보여줄 때도, 사물을 보여줄 때도, 풍경을 보여줄 때도... 한결같은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거든요. 집중력이 떨어졌을 때도 졸거나 화면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굳이 디지털로 본 게 굉장히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군요.

그렇지만 화면에 감탄하면서도 정말 돈을 티 안나는 부분에다 썼다 싶었습니다. 굳이 주인공 벤자민에게 적용된 특수분장과 CG가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굉장히 돈 바른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들을 별로 부각시키지 않고 휘리릭 지나가버립니다. 수십초도 안되는 시간 동안 말이죠. 제작비가 1억 5천만 달러나 들였다는 것이 납득이 가면서도 이럴거면 그렇게 많이 들일 필요가 있었나 싶었지요. 뭐 기어이 전세계 개봉수익 3억 달러를 돌파하며 흑자를 내고야 말았으니 그저 박수를 보낼 뿐이지만서도.

이 이야기는 확실히 판타지적인 설정이 적용되는 우화입니다. 너무 현실적으로 보려고 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솔직히 다들 지적하는대로 남들과 거꾸로 시간을 살아가는 벤자민이 왜 이슈가 되지 않고 실험대상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이 이야기가 그런 내용을 의도하고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주변에 죄다 모든걸 이해하는 사람들만 있어서 큰 충돌도 없이 인생이 잔잔하게 흘러가기만 하는건 좀 재미없었던 부분. 이런 설정이면 당연히 나와야 할 것 같은 헤프닝들조차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버리니 원;

가장 주목되는 볼거리인 벤자민의 변화는 과연 대단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가 노인 모습의 꼬맹이에서 점점 더 우리가 알고 있는 브래드 피트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정말 이 영화를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기게 될 정도였어요. 그리고 브래드 피트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보이기까지 했다는 점이 참. 이걸 메이크업과 포샵질의 성과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해야 할까. 아마 양쪽 다겠죠.

연기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은 없는데, 작중에서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적절한 타이밍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이 많고 인물들이 어떤 상황을 대할 때 반응이 너무 급박하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 부분들은 눈에 거슬려서 아쉬웠지요.

어쨌든 내리기 전에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관이 다 디지털 상영을 지원해주는 홍대 롯데시네마는 역시 브라보. 제발 망하지 않고 앞으로도 버텨주기를. DVD로 봤다면 화면에 대한 감상도 달라졌겠죠. 아마 지금보다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자, 그럼 여기부터는 스포일러와 함께 하는 즐거운 시간입니다


전쟁 중에 예인선에서 동료선원이 '너는 믿고 맡길 수 있다'며 돈을 맡기는 바로 그 순간 전투가 벌어지거나, 아니면 데이지와 여행을 다녀왔더니 때마침 어머니가 죽어서 장례식이 벌어지고 있던 것 같은, 너무나 작위적이고 어떤 전조도 없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사건들은 상당히 거슬렸던 부분입니다. 다른 부분 좀 쳐내고 이런 부분을 자연스럽게 처리하는데 좀 더 공을 들였으면 좋았을텐데. 이건 편집이 문제인지 아니면 애당초 시나리오와 촬영이 문제였던 건지.

중간에 한번 끊어졌던 집중력이 버튼 씨가 벤자민의 아버지임을 밝히는 부분부터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는데, 이 부분도 좀 더 극적인 느낌을 줬어도 좋지 않았을까. 감정적인 면이 너무 잔잔해서 좀 심심한 구석이 많았어요. 그게 이 영화의 색깔이라면 색깔이겠지만, 그래도 2시간 40분 동안 쉬지 않고 봐야만 하는 입장에선 좀 곤욕스럽단 말이죠.

벤자민이 데이지를 사랑해서 떠나는 부분은 납득이 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원작에선 좀 전개가 달랐다고 들었습니다만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네요. 사실 인물들의 행동은 다소 뜬금없는 구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버튼 씨가 갑자기 애 들고 뛰쳐나가는 부분부터 그런 느낌이 시작된 것 같기도 하고.

가장 인상깊었던 캐릭터는 7번이나 벼락맞은 영감님. 이 영감님이 매번 다른 사례를 이야기할 때마다 옛날 흑백영화풍으로 나오는 화면도 아주 코믹해서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문제는 에필로그에 나오는 것까지 포함해도 여섯 번 밖에 안 나왔다는 것. 도대체 마지막 하나는 뭐란 말이냐! 난 분명히 7번 다 나오면서 그로써 사명을 다한(...) 영감님이 감동적으로 임종을 맞이할 줄 알았단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급된 수많은 역사 속의 요소들 중 의외로 제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예언자 에드가 케이시. 생각해보면 아카식 레코드를 이야기하는 그의 예언, 세기말과 멸망, 외계인의 존재를 흥미롭게 다루며 노스트라다무스와 함께 진지하게 믿으라고 했던 시절이 있었죠.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과학동아나 소년중앙에서도 열렬하게 다루고 있었답니다. 별책부록으로 따로 특집을 꾸밀 정도로.

어쨌든 벤자민이 아직 살아있어서 마지막에 아이의 모습으로 데이지를 찾아와서 눈을 감겨주기라도 하지 않을까, 그런 부질없는 드라마틱한 기대를 해봤는데 역시나, 이미 오래 전에 끝나버린 일이었군요. 그래도 벤자민의 인생 마지막을 데이지가 장식해주며 감동을 주긴 했지만요. 마지막 부분, 그러니까 태풍에 의해 거꾸로 가는 시계가 침수되고 벤자민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끝나는 연출도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덧글

  • 무뢰한 2009/03/14 23:37 # 답글

    전관이 다 디지털 상영을 해주는군요 홍대 롯데시네마는...흠.. 고급 정보 알고 갑니다. :) / 저도 버튼 잼있게 봤어요 ^^
  • 로오나 2009/03/14 23:41 #

    무뢰한 // 디지털 지원을 하는 영화에 대해선 100%입니다. 제가 알기론 이런 상영관은 여기가 유일하죠. 상영관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게 단점이긴 합니다만 대부분 F열이나 G열에서 보면 최적인 크기.(5관은 객석수는 비슷한데 스크린 크기는 좀 더 크고)
  • 玄月 2009/03/14 23:59 # 답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고 제 시간은 바로 갑니다

    ...어?
  • 로오나 2009/03/15 10:27 #

    玄月 // 가끔은 거꾸로 가줬으면 좋겠습니다.(...)
  • 玄月 2009/03/15 10:58 #

    거꾸로 가면 또 고통이...
  • 로오나 2009/03/15 10:59 #

    玄月 // 딱 작년 이맘때까지만 거꾸로 가서 전재산을 털고 빚까지 내서 엔화를 사두면...(...)
  • 玄月 2009/03/15 11:00 #

    ...! 그러나 역사가 바뀌어서 엔화가 안 오른다면?!
  • 오거 2009/03/15 00:04 # 답글

    저는 거꾸로 가는 시계가 역에서 내려질 때,
    낡아서 멈췄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돌아가는 걸 보고
    공포영화 2부 복선인가!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제 2의 벤자민 버튼 탄생 예고냐 ㅠㅠ
    하면서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시계가 원래 멈춘게 아니라 그냥 내장바꾸면서
    내린 것 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지막 장면의 인상이 확 달라지네요.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게 내용에도 맞고 보통은 그럴텐데
    제가 좀 엉뚱하게 생각한 듯 OTL
  • 로오나 2009/03/15 10:27 #

    오거 // 뭐 영화 보다가 하나 잘못 보면 연쇄적으로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흔한 일이죠^^;;;;
  • 개피맛사탕 2009/03/15 01:10 # 답글

    전..이 영화랑 비슷한 '막스 타볼리의 고백'이란 책을 힘.겹.게 본뒤라서 이 영화를 볼때 무지무지하게 걱정하면서 봤습니다.ㅡㅡ;;;
    나쁜 영화는 아니였어요. 마치 타인의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보여주는 듯한 그런 영화였어요.실제로 일기를 읽는거지만..ㅎㅎ
  • 로오나 2009/03/15 10:28 #

    개피맛사탕 //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딱 그 정도.
  • TokaNG 2009/03/15 02:16 # 답글

    저는 이거 혼자 보러 갔는데..
    뭔가 혼자 보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물론 상영관에는 관객이 많았지만요..=ㅂ=^)
    누군가에게라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DVD 나오면 사서 여친님에게라도 보여줘야지..[...]
  • 로오나 2009/03/15 10:28 #

    TokaNG // 보여주고 싶은 영화인가요.
  • 리하이트 2009/03/15 03:19 # 답글

    브레드 피트의 외모는 중년시절에도 빛나더군요 'ㅡ'ㅎㅎ
  • 로오나 2009/03/15 10:28 #

    리하이트 // 중년시절엔 묘하게 스티븐 킹이 생각났습니다. 스티븐 킹 생각났다는 사람은 여태까지 못봤는데 왜였을까-_-;
  • 토리 2009/03/15 09:36 # 삭제 답글

    저는 이 영화가 참 지루했습니다.
    사실 이 영화가 어째서 벤자민 버튼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는지도 의심스러웟지요.

    원작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냥 단순히 (나이를 거꾸로 먹는 아저씨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라고 하는게 더 좋았을 것 같네요.


    좋은 각본도 아니었고 아름다운 화면이었지만 구도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고요. 오히려 시간이 조금 만 더 짧았다면 좋게 평가해주었을텐데... ..
  • 로오나 2009/03/15 10:29 #

    토리 // 원작은 안봐서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설정(나이를 거꾸로 먹는다) 외에는 같은게 하나도 없다는건 들었습니다. 저도 20분 정도 더 짧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라고 뭐 본문에도 썼지요. 지루하게 보신 분들은 또 그럴만도 하다고 봅니다.
  • 소시민 2009/03/15 11:58 # 답글

    이곳 저곳에 미국 현대사의 흔적이 묻어난 영화이기도 하죠. 시대

    에 따라 변하는 자동차의 모습이라든지 비틀즈, 카트리나. 우주개

    발 초창기 시절의 로켓 등 흥미로운 볼거리들입니다.
  • 로오나 2009/03/15 12:01 #

    소시민 // 그리고 에드가 케이시도. 21세기판 포레스트 검프라는 이야기도 소리도 많이 듣던데 뭐 각본 쓴 인간도 같으니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_-;
  • 잠본이 2009/03/15 12:27 # 답글

    에드가 케이시 얘기를 너무나 진지하게 하는 장면에서 뿜었던 1人
  • 로오나 2009/03/15 12:38 #

    잠본이 // 오오, 역시 잠본이님! 잠본이님이라면 그 장면 알아봐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 SoulLoss 2009/03/15 20:32 # 삭제 답글

    흐으으으음.... (이라고하고 보지않는다)
  • LgunX 2009/03/16 16:03 # 답글

    저도 그 벼락맞은 할아버지! 집중력 좀 떨어지겠다 싶으면 바로 등장해서 빵 터트려주시길래 손가락 꼽아가면서 봤는데 결국 7번은 다 안 채우던.. 편집된 건 아니겠죠 설마(....)
  • 로오나 2009/03/16 16:19 #

    LgunX // 이 영화의 가장 큰 결함을 한가지 꼽자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각성하라! DVD에서는 다 넣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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