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E - 메카를 사랑하는 자들이 도달한 의인화 없는 이상향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월.E를 봤습니다. 길었어요. 원래 다크나이트 2회차를 뒤로 미루고 월.E부터 볼 생각이었거늘 살다 보니 일이 꼬이고 꼬여서 결국 월.E를 나중에 봤군요. 이번에도 제가 애용하는 시간대인 심야에 봤는데, 애들도 없고 조용~해서 좋았습니다. 꼬꼬마들과 함께 소음 속에 묻혀셔 봤다면 뭐랄까, 좀 괴로운 작품이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케로로는 떠들썩하게 웃으면서 봐도 좋은 작품이지만 월.E는 그런 작품은 아니었거든요.

월.E는 여러모로 혁신적인 작품입니다. 왜냐하면 월.E가 귀엽기 때문이죠.(어?) 월.E는 귀엽습니다. 너무 귀엽습니다. 지나치게 귀엽습니다. 심란하게 귀엽습니다. 흉악하게 귀엽습니다. 어처구니없이 귀엽습니다. 뭐 어쨌거나 귀엽습니다. 진리적으로 귀여워요. 이건 범죄적으로 귀여워요. 제기랄. 너무 귀여워서 홍대까지 가서 디지털관에서 한번 더 보기로 결의해버렸잖아!(야)

...그리고 이 귀여움이 바로 월.E의 핵심입니다. 너무 귀여워서 헤롱헤롱거리면서 90분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뭐 그렇다 치고(...) 이 귀여움이 어떻게 구현됐는가는 대단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월.E의 귀여움이야말로 픽사가 마침내 자신들이 추구해오고 있었던 지향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죠! 그들은 마침내 더러운 '의인화'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습니다!

월.E는 의인화된 기계가 아닙니다. 다른 로봇들도 마찬가지지요. 작중에 나오는 그 어떤 존재들도 의인화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기계와 인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종종 인간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자신에 기초에 만들어낸 인공지능이니까 당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은 인간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억지로 생명을 부여하려고 하지 않고, 기계 자체가 생명의 영역까지 올라온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달까. 비교하자면 스타워즈의 알투디투나 현실에서는 소니의 아이보가 훨씬 더 진화한 모습? 기계지만 마음을 가진, 하지만 인간과 닮은 듯하면서도 그들만의 독자성이 뚜렷한 그런 존재들.

픽사는 원래 무생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장 토이스토리를 봐도 그렇고, 카를 봐도 그렇고, 그들의 로고에서 뛰어다니는 스탠드를 봐도 그렇고요. 다만 토이스토리 때는 아직 의인화에서 벗어나질 못했었지요. 그동안 쌓아온 내공과 열망은, 마침내 월.E라는 작품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월.E는 픽사가 추구해오던, 그리고 쌓아온 것들이 모조리 집대성된 그들의 꿈이에요. 어쩌면 이다지도 꿈결같은 작품이 완성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그 어느때보다도 흐뭇하게 미소짓고 있지 않을까요.

월.E는 인간처럼 말하지도, 인간처럼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닮아있지요. 작중에서 월.E와 이브가 말하는 대사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어색해서 기계다워요. 그런데 그런 대사 하나하나가,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어쩌면 그리도 사랑스러운지. 기계들이 손을 잡는 한장면이 왜 그리도 가슴을 울리면서 사람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던지.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영화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왜냐하면 러닝타임 90분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제대로 된 대사가 존재하지 않거든요. 월.E와 이브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대사'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느낌. 그런데 이런 작품을 그렇게나 몰입해서 볼 수 있다는건 정말 놀랍다 못해 기적적인 일이지요. 이게 다 월.E가 귀엽기 때문인데(...) 이 귀여움이 어떻게 완성되어 있는가는 진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논할 수가 없습니다. 말로 설명해서 전달하는게 불가능하고, 정지화상을 보고서도 절대 느낄 수 없어요.

그래픽에 대해서는 더 논할 것도 없습니다. 매우, 대단히, 엄청 훌륭합니다. 이건 실로 퍼펙트. 드림웍스가 완성해낸, 어딜 봐도 아름다워서 경탄하게 되는 쿵푸팬더와는 또다른 방향으로 완성된 영상미를 보여주고 있지요. 픽사가 그들 역사상 최초로 실사와의 합체를 이루어냈다는 부분도 중요한 부분인데, 그것조차도 유머의 대상이 되니 웃지 않을 수가^^; 게다가 정말 의외로 동적이고 스펙터클한 연출도 많이 들어가 있어서, 전반적인 영상이 주는 것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눈이 즐거워지기도 하고요.

스텝롤 부분도 아주 좋았어요. 요즘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경향인데, 스텝롤조차 재미있게 볼 수 있게 하는 노력은 중요하다고 봅니다. 올 여름에는 쿵푸팬더에 이어 소림소녀에서(...) 그리고 미이라3에서(...), 그리고 케로로 VS 케로로 천공대작전에서, 다시 월.E까지 그런 작품들이 많네요. 뭐 저중에서 몇가지는 작품 자체가 어땠느냐는 그냥 건너뛰기로 하고.(...)

미국에서는 이미 2억 달러 이상의 흥행수익을 기록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번주 박스오피스에서 3위를 차지하면서 5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여러 여건들 때문에 그리 많은 개봉관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 작품을 100% 즐길 수 있는 디지털관이 처참하리만치 적은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다니 놀라울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아쉽습니다. 롱런하면서 확장개봉해주면 좋겠어요.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고, 애완동물의 귀여움을 환장하도록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추천!


자, 그럼 여기부터는 스포일러와 함께 하는 즐거운 시간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 스포일러 걱정을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를 하도록 하죠. 일단 설정도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지구가 온통 쓰레기에 파묻혀서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어버렸기 때문에(덤으로 달도) 모든 인류가 지구를 떠나버리고 나서 700년. BNL사에서 만든 월.E들이 지구의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어요. 이제 지구에는 살아있는 생물도 없고, 움직이는 월.E도 우리 월.E 한대만 남았지요. 월.E는 혼자만 남은 고독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가끔 고장이 나면 이미 가동을 정지한 다른 월.E들에게서 부품을 보충해 수리해가면서요. 이거 인간으로 치면 시체로부터 장기를 뜯어서 자신의 몸에... 무섭잖아;ㅁ;(덜덜)

어쨌든 700년간 존재해오면서 월.E는 데이터의 축적 때문일까, 초기에는 없던 성격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은 그의 행동에서도 드러나고, 마지막에 잠시 기억이 사라졌을 때도 극명하게 나타나지요.

영상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토성의 고리에 손을 넣고 춤추는 얼음입자들에 둘러싸인 월.E라던가, 소화기 분출을 이용해 이브와 함께 우주에서 춤을 추는 월.E라던가... 격렬한 드라마는 없지만 90분이 지루하지 않지요. 우주라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연출들이 돋보였어요.

누군가 말했듯이 '이젠 기계들까지 염장질이냐!' 하는 생각도 드는 월.E와 이브의 연애질은 참 뭐랄까, 너무 귀여워서 할말이 없습니다. 손 한번 잡아보려고 부들부들 떨면서 용기를 내는 월.E의 모습이라니! 전류가 흐르는 키스(라고 하겠음. 일단은;)나 둘이 손을 잡는 모습이 왜 그리도 미소를 짓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던지. 정말 뻔할 뻔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간중간마다 웃고, 눈물 짓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 큰 어른이 이러고 있는 모습을 백주대낮에 보이지 않았으니 심야상영은 실로 정의롭습니다.(먼 산)

인간들의 변화는 정말 빅히트. 실사인간들이 도대체 왜 튀어나오나 싶었더니 700년 동안 중력이 약한 우주에서 어디든지 날아가주는 의자에 앉아 놀았더니 뼈는 약해지고 피둥피둥 살쪄서 일상적인 거동마저 힘든 지경으로 변화해 마침내 CG 인간으로! 마침내 자신의 두 발로 서서 고향별 지구로 돌아간 인간들은, 스텝롤에서 보여주듯이 기계들과 힘을 합쳐 원시라고도 문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기묘한 생활을 향유하며 살아갈 것이고 언젠가 정상적인 인간으로서의 체형을 되찾겠지요. 그리고 그들의 곁에는 최고의 귀여움으로 진화한 로봇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자신들의 꿈을 만들어낸 픽사에게 건배. 부디 당신들의 다음 작품도 이만큼 아름답기를.





덧글

  • 이정퓨 2008/08/12 22:09 # 답글

    픽사의 누적된 스킬이 빵 터진 느낌이랄까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다크나이트가 아리고 쓰라림 속에서 인간미를 추구하는 감동이었다면 월E는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감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막판 스탭롤의 스토리에 따른 화풍 변화(원시 벽화에서 인상파로)는 정말 인상깊었어요ㅠㅠㅠ
  • 네오바람 2008/08/12 22:22 # 답글

    지금 2회째 시청중인데 더 가봐야할지 아니면 나중에 dvd로 볼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 로오나 2008/08/12 23:16 # 답글

    이정퓨 // 빵~ 터졌죠.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웠고요.

    네오바람 // 전 블루레이를 기다리는 중.
  • 붉은울림 2008/08/12 23:16 # 답글

    정말 멋진 작품이죠 ;ㅁ;
  • Cranberry 2008/08/13 00:16 # 답글

    우왕 무척 맛깔나게 쓰신 멋진 감상글에 공감 듬뿍 하고 갑니다~
    저도 블루레이를 기다리겠다고 결심하고 있지요. ^0^
  • sengbin 2008/08/13 02:04 # 답글

    상영시간 내내 버릴 장면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ㅠ.ㅠ 정말 흉악스럽게 귀여웠어요~~
  • 이실피르 2008/08/13 03:20 # 답글

    쿵푸팬더와는 다른 올해의 최고의 애니메이션중의 하나입니다.
    진짜 숭악하게 귀여운 월E!!

    모 : "Foreign Contaminant!"
  • 2008/08/13 03:3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로오나 2008/08/13 03:49 # 답글

    붉은울림 // 예. 정말ㅠ_ㅠ

    Cranberry // 예. 전 디지털로 한번 더 볼 생각입니다. 블루레이도 퀄리티 충분하게 뽑아주겠지요. 기왕이면 추가분을 더해서 나와줬으면 해요.

    sengbin // 존재 자체가 범죄입니다ㅠ_ㅠb

    이실피르 // 소심한 오타쿠 청년도 살짝 떠올리게 하는.(...)

    비공개 // 여기서 말하는 의인화는 캐릭터적인 의미죠 :) 그들을 인간처럼 묘사했다는 것은 꼭 그들이 인간의 마인드를 갖고 행동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모든 액션에 관련된 이야기지요 :)
  • 2008/08/14 15:2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배트맨 2008/08/15 21:06 # 답글

    정말 그들이 왜 픽사인지 보여주더군요. 완성도와 오락성에서 뭐 하나 흠 잡을 것이 없는 완벽한 애니메이션이였습니다. 비주얼도 정말 눈이 즐거울 정도였고요. 꽤 재미있게 보고왔습니다. ^^
  • 로오나 2008/08/15 22:08 # 답글

    비공개 //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요? 단순히 사랑은 기적을 일으킨다로 볼 수 있겠고^^;

    배트맨 // 예. 시종일관 아름답고 행복한 애니메이션이죠^^
  • Kakiru 2008/08/15 22:33 # 답글

    방문 감사합니다 ^^ 전 영화보면서 (쪽팔려서) 눈물이 찔끔 나오는데도 울지도 못했어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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