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고백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사실 다크나이트를 굉장히 삐딱한 기대감을 갖고 보러 갔었다는 것. 영화 자체에 대한 기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저는 배트맨이라는 부잣집 아들내미의 돈지랄 된장 히어로질의 산물에 대해서 이상한 반감을 갖고 있었어요. 그 반감은 팀 버튼의 배트맨 때부터 줄곧 이어져온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배트맨 영화를 좋아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로, 저는 배트맨이라는 히어로에 대해서는 멋지다고 생각하는 반면 어딘가 싫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거지요.
그런 마음 때문일까, 개봉하기 전부터 온통 사이비교주님을 찬양하듯 열광적인 찬양이 쏟아지는 이 영화에 대해서는 비틀린 기대감이 형성되고 말았습니다. '오, 재밌겠다. 올 여름 대박 하나 났군.' 이렇게 순수하게 기대하는 마음 이면에 '그래봤자 배트맨이잖아. 부모한테 막대한 유산 물려받고 띵까띵까하면서 취미로 된장 히어로질이나 하는 놈이 나오는 영화를 얼마나 대단하게 만들 수 있다고? 이렇게 찬양 일색이니 나는 한번 까볼 점을 찾아봐주겠어.'하는 악의가 있었다는 거지요. 지금 와서 좀 거창하게 생각해보면 그건 마치 배트만과 조커의 관계 같군요. 양자를 모두 바라보고 있었던 저는 고담이자 투페이스?(이봐)
그러나 저는 결국 배트맨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와서 배트맨이라는 세글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이미지가 춤을 추는지! 굳이 유년기의 감성형성에 치명적인 역할을 담당해준 팀 버튼의 배트맨을 들지 않더라도, 빅오가 구축한 이미지의 원형으로 불리는 배트맨 애니메이션을 비롯해서 배트맨 비긴즈, 다크나이트에 이르기까지. 슈퍼맨을 사랑한 적은 유년기 시절뿐이었고, 스파이더맨을 사랑한 시간은 짧지만 배트맨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의식의 한켠을 지배한 채 또다른 완성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결론적으로 한방 먹었습니다. 그런 비틀린 기대감조차 시원스러운, 그리고 폭풍 같은 연타로 무너뜨리고 그로기 상태로 몰고가는 압도적인 퀄리티를 자랑하는 다크나이트.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올해 최고였습니다. 덤으로 21세기에 본 모든 영화 중에 최고이기도 했습니다. 헐리웃 블록버스터를 매우 사랑하는 저는, 다크나이트 이전까지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2를 헐리웃이 이루어낸 정점으로 꼽으며 향후 10년 안에 이 작품을 능가하는 히어로 블록버스터가 나오기 어려우리라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2010년이 되기도 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다크나이트는 제 안에서 스파이더맨2를 능가해버렸어요. 하하하.
스포일러로 들어가기 전에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배트맨이 아니고 조커라고 봅니다. 제가 이전 감상 때도, 이번 감상 때도 조커 버전의 포스터를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죠.(이미지적으론 배트맨 버전 포스터가 멋진게 많았는데) 이 영화는 기존의 히어로물을 초월했음은 물론, 배트맨 자체를 초월해버렸습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하죠. 이 영화에서 배트맨은 대체될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배트맨이 나오건 말건 대체할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겁니다.(폭력으로 선과 정의를 관철하려는 존재라면 누구나) 하지만 조커는 그럴 수 없습니다. 조커는 이 이야기의 중심이자, 모든 것이고, 또한 영화 자체를 악몽 같은 영향력으로 지배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두려운 존재이며, 증오스러운 존재이며, 동시에 사랑스러운 존재이기도 하죠. 히스 레저의 혼과 생명을 먹고 태어난 조커라는 존재는, 실로 유니크했습니다. 누구도 그를 대체할 수 없어요. 그는 분명 전설이 되겠지요.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의 이야기였지만 다크나이트는 조커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완전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속편으로의 가능성은 닫혀있고, 속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렇게 만들어놓고, 이렇게 끝내놓고 후속작이 나온다면 그건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편은 나오게 되겠지요. 분명 전세계의 목소리가, 그리고 막대한 돈이 헐리웃을 움직여 배트맨을 다시 한번 스크린으로 불러낼 겁니다. 부디 바라건데 속편의 메가폰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아닌 다른 이가 잡게 되지 않기를. 또한 이 시리즈에 영원히 로빈과 배트걸이 나오지 않기를. 우리는 이미 팀 버튼의 배트맨 이후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경험했습니다. 엑스맨 : 최후의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미이라3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자, 그럼 여기부터는 스포일러와 함께 하는 즐거운 시간입니다
먼저 놀란 것은 레이첼에 대해서였습니다. 설마 히로인을 이렇게 보내버릴 줄이야? 레이첼이 왜 갑자기 이렇게 못생겨졌나, 3년 사이에 팍삭 늙었나? 꽤 볼만한 외모였던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배우가 케이티 홈즈에서 메기 질렌홀로 바뀌었더군요. 중반에 레이첼이 죽어버리는 전개에 화를 내면서 출연을 거부했다는 에피소드를 본적이 있는데, 그게 이유였나 봅니다. 메기 질렌홀의 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되더군요. 그건 그렇고 다크나이트의 레이첼은 배트맨 비긴즈에서처럼 짜증나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그때의 잔상이 남아있기 때문인지 레이첼이 사망했을 때 솔직히 좀 속이 시원했습니다.(문제 있음) 무엇보다 스토리적으로 죽음으로써 충분한 역할을 해주기도 했고요. 그녀가 브루스 웨인에게 남긴 착각을 뭐라고 해야 할까. 결국 선택받은 것은 하비 덴트였고, 그는 사랑받았기에 미쳐버렸지요.
이 영화는 배트맨에 대해서 많은 것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전작이 영웅으로서의 탄생을 그려냈다면 이번에는 그가 가진 수많은 모순과 몰락을 그려내지요. 다들 지적하는대로 배트맨을 흉내낸 자경단들과 그는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게 있다면 그는 그들보다 좀더 능력이 있고, 든든한 백업을 받고 있다는 것뿐. 그런 모순을 유머로 얼버무리려고 하지만, 모순은 깊어질 뿐 사라질 리가 없지요. 수많은 모순을 끌어안은 채 조커의 계략에 의해 시민들에게조차 공격의 대상이 되는 배트맨은 결국 타락하지는 않습니다만, 몰락하고 맙니다. 진실만으로 세상을 지켜낼 수 없기에 거짓으로 필요한 정의를 지켜내고 그 자신은 몰락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조커에 대한 패배선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물론 이 과정에 대해서는 수많은 감상과 의견이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타락하지 않고 불살을 관철하는 모습은 멋졌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안이한 감상으로 보이기 쉬운 신념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너무나도 명확한 대립각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된 신념으로써 배트맨을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조커가 말한대로 그들은 서로를 완성시켰지요. 아마 후속작이 나온다면 다크나이트로 몰락한 배트맨이 다시 영웅으로 일어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요? 이에 적대하는 관계로는 역시 펭귄이 굉장히 어울려 보이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펭귄이 싫으므로 등장시키지 않겠다고 공언한 이상 제가 모르는 새로운 적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보이네요. 매력적인 적을 등장시켜주길 바랍니다.
시민들과 죄수들이 조커에게 악마같은 선택을 강요받고서도 결국 상대방을 죽이지 못하는 모습은 많은 것을 시사했습니다. 그건 인간에게 선을 믿는 마음이 남아있고, 또 희망적인 미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찝찝한 뒷맛을 남기죠. 그 부분을 조커의 패배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죄수들이 보여준 단호함에 비해 시민들이 보여준 미온적인 태도 때문인 것 같아요. 아마 이 부분도 많은 해석이 나올 수 있겠지요.
블록버스터다운 맛은 아무래도 좀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 영화 속에는 수없이 많은 멋진 이미지들이 들어있습니다. 특히 배트포트를 타고 달리는 배트맨의 모습이란! 결국 그걸로 사람을 치진 못했지만 기물파손을 거침없이 저지르는 모습을 보면서 '사실 당신은 욕먹어도 싸'라고 생각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배트맨이 달려가는 길목에 차를 주차했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재산손실을 본 시민들에게 묵념을. 그런 상처는 보험처리만으로 보상되는게 아니죠.(...)
보면서 이토록 오랫동안 전율한 영화는 처음입니다. 다 보고나니 그야말로 하룻동안 쓸 기력을 전부 써버린 기분으로 탈진해버렸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아쉬움이 몇가지 있습니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바로 하비 덴트의 존재. 사실 영화를 보면서 배트맨과 하비 덴트의 관계에는 한방 먹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예고편 등을 보면서는 당연히 둘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존재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브루스 웨인은 하비 덴트를 믿었고, 하비 덴트는 배트맨을 믿었습니다. 둘은 서로를 신뢰하며 악을 척결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갑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악몽 같은 사이코패스 조커에 의해서 산산조각으로 무너지고 말죠. 그렇게 해서 탄생한 투 페이스는 굉장한 설득력을 가지는 존재였습니다만, 이 영화 속에서 그 존재감이 충분히 살아나기에는 다소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30분 정도가 편집되었다고 하는데 대부분이 투페이스 부분이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요. 하비 덴트는 투페이스로 탄생하기 이전까지는 설득력 있고 존재감도 훌륭한 캐릭터지만 투페이스가 되고 나서는 다소 시시할 정도로 급박하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배트맨이 스스로를 몰락시키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30분까지는 아니어도 10분 정도만 그를 위해 더 할애해줬어도 느낌이 완전히 달랐을텐데, 여러모로 아쉬운 마음뿐입니다. 개인적으론 DVD나 블루레이 버전에서 추가되어줬으면 좋겠네요.
배트포트를 타고 달리는 배트맨이 멋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화는 역시 블록버스터에 기대되는 영상적인 파워는 좀 부족한 편입니다. 그러니까 스펙터클함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병원 폭파씬 같은 것은 분명 멋졌지만, 그것으로 끝이라는 거죠. 배트맨의 액션은 전작처럼 '자신없는 감독이 도망치듯' 중심 없이 흔들리는 연출을 사용하지 않고 깔끔하고 임팩트 있게 연출되지만, 역시 그걸로 끝입니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색채감이나 이미지는 매우 강렬하고 매혹적이지만 블록버스터에서만 가능한, 돈 쳐들여서 만들어내는 영상 임팩트는 부족했어요. 사실 아이맥스로 찍었으니 꼭 아이맥스에서 보고 임팩트를 느끼라고 설레발을 치지만 않았어도 이걸 굳이 단점으로 집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는데, 아이맥스관에서 보면서 참 별로 보람이 크진 않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외에는 배트맨을 상징하는 박쥐떼가 나와주지 않은 것도 아쉬움이 남는군요. 그런 면에서는 배트맨 비긴즈가 참 좋았는데... 역시 그런 영상미적인 부분에서도 이 영화에서 배트맨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작에 비해 월등히 낮아졌다는걸 보여주었는지도 모르죠.
조커에 대해서는, 오, 도대체 그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히스 레저의 영혼과 생명을 먹고 태어난 조커는, 압도적인 영향력으로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사 윌리엄의 그 청년이 이런 캐릭터를 이렇게 연기해낼 거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그는 공포스럽고, 익살스러우며, 그러면서도 슬픈 존재입니다. 그는 분명 정신나간 사이코패스고, 테러리스트지요. 오로지 혼돈만을 위해 모든 가치를 닥치는대로 파괴하는 그를 도대체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분명한 그는 배트맨의 그림자로부터 태어났고, 배트맨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것. 그 자신이 말하듯이 그것만은 틀림없겠지요. 그리고 저는 또 하나, 그도 또한 배트맨을 완성시켜주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DARK KNIGHT라는 존재로요. 악은 정의로부터 잉태되었고, 정의와의 대립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수많은 씨앗들이 이 세상에 남아, 또다른 혼돈이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작중에서 배트맨이 신념을 관철함으로써 살아남았지만, 히스 레저의 죽음으로써 진정 유니크한 전설이 되어버렸어요. 다크나이트 속에서 그는 히스 레저가 아니고 조커였습니다. 배우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은 채, 진정한 악마로 완성되었습니다.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끓는 다크나이트지만 그래도 재관람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올해에 두번 이상 극장에서 볼 맘이 든 영화는 쿵푸팬더와 다크나이트 뿐이군요. 일단은 월요일에 다시 보려고 예정하고 있는데, 그때도 새로운 감상을 올리게 되겠지요.
p.s - 고담시의 시민이 3천만이라는 부분에서는 입을 쩌억. 서울시보다도 인구가 3배나 많았단 말이냐! 초인도 아닌 주제에 저런데를 혼자 커버하려고 하다니 부르스 웨인 당신의 히어로 놀이는 정말로 스케일이 크다! 사나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