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와서 배트맨 비긴즈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여기저기서 보이는 '과연 다크나이트 전에 배트맨 비긴즈를 볼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들 때문입니다. 이 의문에 많은 사람들이 필요없다고 답합니다. 그 말대로 다크나이트는 배트맨에 대해서 최소한의 사전지식만 알고 있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지요. 기왕이면 팀 버튼의 배트맨을 보지 않았다면 좀더 선입견 없이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다크나이트를 진짜로 깊숙이 즐기고 싶다면, 반드시 배트맨 비긴즈를 볼 필요가 있다고.
배트맨은 아주, 진저리나도록 유명한 히어로 중 하나입니다. 팀 버튼의 배트맨 덕분에 한국에서의 인지도도 대단히 높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쉽게 배트맨에 대한 사전지식을 얻을 수 있고요.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들어낸 배트맨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배트맨 비긴즈를 봐야만 합니다. 다크나이트만으로는 불충분해요. 다크나이트는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영화고, 사실 속편이 필요없는 완결성마저 갖춘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반은 배트맨 비긴즈가 구축한 것입니다.
전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차라리 팀 버튼의 배트맨을 못봤다면 모르되, 봤다면 배트맨 비긴즈도 보고 나서 다크나이트를 보세요'라고.
저는 웹상에서 보이는 여러 감상들을 보면서 팀 버튼의 배트맨이 주는 편견이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다크나이트를 즐기는데 독으로 작용한다는건 틀림없다는 느낌을 받았죠. 고담시는 어떤 이미지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배트맨은 어떤 성격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조커의 캐릭터가 어때야 하는가.
사실 팀 버튼의 배트맨에 나온 조커를 '원작'으로 놓고 이번 조커를 그와 비교해서 이미지가 다르다고 투덜거리는 건,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포인트가 어긋난 감상이라고 봅니다. 이게 가장 다크나이트를 재미없게 보는 방법인 것 같아요. 히스 레저의 조커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구축한 배트맨 월드, 그 안의 고담시에서 완전합니다. 어느쪽이 원작에 가까운가 하면 절대로 팀 버튼의 배트맨은 아니라고들 하고요. 팀 버튼의 배트맨은 오로지 팀 버튼만의 오리지널리티가 듬뿍 퍼부어진 걸작이었죠. 저도 엄청 좋아하고요. 어떤 배트맨 영화가 나오든 그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는건 불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관계없이 새롭게 독립된 세계로 만들어진 작품을 거기에 끼워맞추면서 보는건 하면 할수록 하는 사람이 영화를 재미없게 보게 될뿐이에요.
배트맨 비긴즈는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난감한 구석이 많은 영화입니다. 저는 무척 재미있게 봤지만 당시에도 난감한 부분들이 많았죠. 예를 들면 하필이면 브루스 웨인을 훈련시킨 조직이 닌자군단이었다던가.(그들이 닌자의 스타일을 선택하고, 배트맨이 그 방식을 살리는 것 자체는 좋았지만 하필이면 닌자군단이었던 것은 정말 싸구려 저질 니혼텔리즘으로(일본 + 오리엔탈리즘 멋대로 합성어) 보였달까) 듀커드가 비싼 집에 불질러가면서 '제자야, 나랑 싸우자!'하면서 전형적인 싸구려 이중성을 드러내는 전개라던가, 고담시를 전복시킬 음모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어서 비웃음을 자아내게 된다던가, 액션장면이 얼마나 연출에 자신이 없었으면 도망치는 감독들의 전매특허인 중심 안 잡고 마구 흔들어대기를 사용했다던가... 등등 까기 시작하면 이게 또 한도 끝도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맨 비긴즈가 팬들이 보기에 매력적이었던 것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새롭게 자신만의 배트맨 월드를 구축하면서 보여준 요소들 때문이었습니다. 배트맨의 수리검은 하나하나 일일히 갈아서 만든 수제품이었다던가, 정체를 감추기 위한 음성변조는 기계를 쓴게 아니라 스스로 목소리를 변조한 거였다던가, 탱크주의 배트카라던가, 기타등등, 기타등등 찾기 시작하면 이게 또 한도 끝도 없이 나오지요.
그런 요소들은 모여서 크리스토퍼 놀란표 배트맨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다크나이트는 그 연장선에 있는 영화고요. 배트맨 비긴즈를 본 다음에 그런 요소들을 전부 숙지하고 다크나이트를 보게 되면, 다크나이트에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설명되지 않은 많은 것들이 함께 이해되지요. 팀 버튼의 배트맨만 보고 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다크나이트 안에는 의외로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크나이트가 탄생했기에 배트맨 비긴즈는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의미를 부여받았습니다. 헐리웃의 상업성이 다른 누구도 아닌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이 시리즈의 다음 작품을 만들게 하기를 기대하면서, 배트맨 비긴즈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