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로 보고 왔습니다. 호평과 악평이 극명하게 공존하는 데다가, 호평 쪽도 악평에서 드는 요소를 긍정하고 있고, 또한 주변의 평이 무척이나 미묘했기 때문에 기대치를 낮추고 머릿속에서 처음부터 몇가지 조정사항을 거치고 나름대로 '원티드 즐기기 모드'를 만들었는데 이게 제대로 먹혀들어갔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이 영화 재미있게 봤다는 이야기.
'원티드'를 즐기기 위해 머릿속에서 조정해야하는 사항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개연성을 기대하지 마라 - 그것이 심리적 개연성이건, 내용적 개연성이건간에. 깊이 따지고 들면 지는 겁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보세요.
2. '말도 안돼'를 머릿속에서 치우고 가라 - 모건 프리건하고 안젤리나 졸리가 된다면 다 되는 겁니다. 이 두 사람이 된다고 하면 초능력이건 물리법칙 무시건 다 가능한걸로 바뀝니다. 그러려니 하세요.
3. 절대 진지하게 보지 마라 - 영화는 기본적으로 진지한 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는 사람은 진지하면 재미없을 겁니다. 그냥 뭐가 나와도 웃어주겠다는 생각으로 보세요.(실제로 웃기기도 하고;)
4. 이 영화는 천박하다 - 절대 고상하지 않습니다. 천박한 뭐가 나오건 그러려니 하세요. 다 알고 있었지, 훗. 하고 쿨하게 웃어주고는 즐기면 되는 겁니다.
이 네 가지만 머릿속에 박고 간다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비 빼곤 다 철저하게 B급이고 애당초 B급 마인드로 만들어진 영화에요. 그러니 그런 감성을 즐길 수 있냐, 아니냐로 이 영화의 평이 갈리는건 지극히 당연하게 보입니다. B급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면 아예 관람을 포기하시길 권장하고 싶어요.
어쨌든 내용은 워낙 어처구니없는 부분이 많고 사람들 심리는 더 그렇고 납득가는 부분은 납득가지 않는 부분보다 적은, 근데 왠지 그런거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은 그런 영화입니다. 그런 부분을 꼼꼼하게 따지면 지는 거다! 라고나 할까^^; 일단 총질 액션씬 중에 마음에 드는 장면들이 몇개 있었던 데다가 대박 명대사도 하나 나왔기 때문에, 위에 열거한 4가지 사항으로 머릿속 관람모드를 체인지시킬 수 있는 분들에게는 추천하고 싶어요.
자, 그럼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분이 듬뿍 함유된 이야기.
악평 중에서 '원작과 설정이 판이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정말 다르긴 다르더군요. 저도 원작을 보진 못했습니다만 웹상에 도는 여러 정보들을 접해본 결과 심란할 정도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원작은 원래 지구는 슈퍼 히어로와 슈퍼 악당들이 누구나 알 수 있게 존재하며, 서로서로 싸우는게 당연한 세계였는데 슈퍼 악당들이 결국 슈퍼 히어로들을 제압하고 승리! 승리한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살아남은 모든 존재(심지어 살아남은 슈퍼 히어로들조차도)의 기억을 조작해서 '지구는 슈퍼 히어로도 슈퍼 악당도 없는 평범한 세계'로 인식시키고, 그들이 존재했던 과거의 진실된 역사를 만화책 속으로 묻어버린 채 세상을 그림자 속에서 좌지우지한다는 멋지구리구리한 셋팅의 이야기입니다. 그 안에서 주인공이 하는 일도 악당끼리의 파워게임인 듯하고. 이런 설정은 살려줬으면 훨씬 매력적이었을 것 같군요. 직조공 길드가 천속에서 신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암살길드를 조작해서 정의구현을 위한 살인행위를 시작했다는 영화판의 설정은 전혀 매력적이기는커녕 시시한데다 존재의 당위성조차도 어이없을 지경이니까요.
초반에 갑자기 어린이에게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19금 장면이 등장할 때는 저도 좀 놀랐습니다만 영화 전체 분위기를 보면 그러려니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잔인성도 생각보다 높지 않았는데, 총알에 머리가 뚫리는 연출 정도는 등급을 보면 그러려니할 수 있는데다 이 영화하곤 꽤 어울리고, 칼로 찢고 베고 찌르는 부분은 자세히 보여주질 않아요. 그냥 분위기만 음미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으로 보여줘서 크게 지장 없습니다. 물론 이런 것에 극단적으로 약한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죠.(사실 저도 약한 편인데 내성이 생긴 건지;)
모건 프리먼의 캐릭터에는 좀 실망했습니다. 너무 뻔한 악역인 데다가 별 깊이가 없는 캐릭터라서요. 그의 연기력을 생각하면 좀 더 깊이있는 캐릭터가 어울릴텐데 요즘 그런 역을 맡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이번에도 분위기는 아주 잘 잡아주셨습니다만 마지막에 갈때는 허무했습니다.
안젤리나 졸리는 시종일관 멋졌습니다. 마지막에 갈 때는, 아, 솔직히 진짜 안젤리나 졸리를 보내버릴 줄은 몰랐는데^^; 하여튼 갈때도 나름 멋지게 갔죠. 근데 솔직히 안젤리나 졸리도 좀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싶어서 가슴이 아프더군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때만 해도 훨씬 더 생기넘쳤는데ㅠ_ㅠ
주인공을 맡은 제임스 맥어보이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책없이 찌질한데다 주제파악 못하고 자아도취에 빠지기 쉬운, 그런 점을 조직에서 이용해먹기 딱 좋은 머저리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자기 인생을 바꾸겠다고 해놓고 시원스럽게 자아도취로 선택한 길은 결국 사람 잡는 백정. 양심상 얄팍한 고뇌를 한번 내보여주지만 남의 그럴싸한 말 한마디에 날아가버리고 그 이후부터는 아주 대놓고 즐거워하면서 사람 팍팍 죽이기 시작하고, 그 후의 행동들, 특히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의 행동도... 후후후. 총질액션도 꽤 잘한 것 같아요. 이 영화에서 의도한 인상깊은 대사 'I'm sorry'도 꽤 임팩트 있었고. 마지막에도 들려줬으면 더 좋았을 대사였는데.
가장 기대를 모았던 총질액션은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칼질이 나오는 부분은 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총질부분은 너무 유쾌해서 와하하하핫-하고 웃지 않을 수 없더군요. 메이저 리그의 인기투수 저리가라 할 정도의 절묘한 궤도로 꺾여서 표적을 맞추는 총알도 그렇고, 총알로 총알을 쏘아맞히는 연출도 그렇고. 처음과 마지막에 사용된 일단 결과를 내놓고 되돌려 보여주기 연출도 그렇고요. 초반의 총격전도 그렇지만 마지막에 조직에 돌입하고 다 때려부술 때는 정말 멋졌습니다. 게다가 안젤리나 졸리의 라스트 샷은 독수리 오형제!(웃다 죽을 뻔했음;) 다만 마지막에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거는 연출은 그야말로 사족. 없었으면 좋았을 것 같군요.
그나저나 2를 만들 건덕지를 남겨놓지 않고 죄다 쓸어버린 것도 좀 의외로군요. 어느정도는 떡밥을 남겨놓을 줄 알았고, 그게 모건 프리건의 생존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냥 보내버리더라고요. 주인공이 살았으니 만들라면 만들 수는 있겠지만 1에서 연계되지는 않는 별개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그것도 다 이 작품의 흥행이 성공해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사실 흥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미묘하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다음주 박스오피스 흥행결과를 주목해봐야겠죠.
그나저나 역시 이 영화 최고의 명대사는 '멋진 놈'. 그 하나만으로도 빌어먹을 남자친구 베리는 등장한 보람이 넘쳤습니다. 보신 분들은 다들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