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스피드 레이서는 별로 기대를 안하고 보러 간 영화입니다. 몇개월 전부터 예고영상들을 보면서 영 시큰둥했거든요. 너무 붕 뜬 듯한 비현실적인 영상이라서 과연 레이싱 장면도 재미있을까 싶었습니다. 최근에는 우리의 월드스타(?) 비가 '이만큼이나 나온다!'라고 알려주는 듯한 예고편도 떴는데, 그 전에 아이언맨 보면서 극장에서 본 예고편에도 비는 코빼기도 안비췄기 때문에 '뭐 딱 그 예고편에서 나온 만큼만 나오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모로 '이번주에는 이걸 보겠지만 아이언맨을 본 다음이니까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보러 가는 게 좋겠어'라는 느낌이었죠. 근데...
이거, 끝내주게 재밌습니다.
진짜에요. 진짜 환호성을 지르면서 보다 왔습니다. 제기랄, 무진장 재밌잖아!>_< 평론가들이 시사회 등에서 평했던 '처음에는 지나치게 이질감이 강하지만, 한번 익숙해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영상'은 정말 말 그대로였습니다. 레이싱 장면의 퀄리티가 작고 열악한 화질로 볼때하고는 차원이 다르군요. 이건 진짜 끝내줍니다. 엄청 몰입하면서 봤어요. 이건 그야말로 헐리웃판 사이버 포뮬러다! 하는 김에 사이버 포뮬러도 실사판으로 만들어라!
영상에 대해서는 정말 호오가 갈리는 듯한데 사이버 포뮬러 시리즈를 죽 봐왔고, 처음부터 기대의 방향성을 제대로 잡고 간다면 신나게 즐기다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속 800킬로미터로 달리면서 선보이는 액션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 만화라고밖에 할 수 없는건 사실인데, 애당초 질량이나 중력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말고 만화를 기대하고 가세요. 이건 그냥 사이버 포뮬러를 영화화 시켜놓은 물건인 겁니다. 리프팅턴이 나오건 이너셜 드리프트가 나오건 하나도 이상할게 없습니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레이싱 애니메이션보다도 신나는 연출을 헐리웃의 기술을 총동원해서 노골성 120%의 총천연색으로 작렬시킨 결과물인 것이죠. 전 레이싱 부분의 퀄리티에는 백점만점을 주고 싶군요. 제가 기대하던 것을 훨씬 초월했어요~-_-b
원작인 '마하 GoGoGo!'는 이제 기억도 안날 정도지만(우리나라 제목이 '달려라 번개호'였던가 아마) 이런 애니메이션이다,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런 부분을 멋지게 요즘 센스에 맞게 영화화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사이버 포뮬러 시리즈도 1기 TV판에서는 마하 GoGoGo의 오마주로 시작한 작품이었죠. OVA로 넘어가면서 방향성이 많이 바뀌었지만. 어쨌든 음악도 고전의 그것을 어레인지시켜서 이 영화의 스피드에 맞는 리듬으로 아주 잘 만들어놨더군요. 덕분에 분위기에 흠뻑 취해서 마지막에 스텝롤 올라올 때는 자리에 앉아서 계속 따라서 흥얼거리고 있었어요^^;
자, 그럼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분이 듬뿍 함유된 이야기.
스피드 레이서는 '영세한 정의의 편이 악의 대기업과 싸워서 승리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약하자면 '열정이 있다면 정의는 이긴다!' ...아니 뭐 평론가들의 평을 보면 여기에 온갖 심오막측한 평을 갖다붙여놨던데,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겠습니다만(사회적인 의미에서 해석도 가능한 면이 많고 그런걸 어필하고 싶어하는 구석도 많은데 잘 절제한 느낌) 단순하게 보면 정말 가족이 소중하고 레이싱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은 스피드 레이서라는 녀석이, 온가족의 힘을 하나로 모아서 돈의 노예가 된 대기업의 음모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는 내용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 뻔하고 진부한 듯한 스토리를 센스있고 몰입해서 볼 수 있는 힘을 갖춘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놨다는 점에 박수. 좋은 스토리라는 것은, 특히 영화에 있어 좋은 스토리는 기기묘묘하고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스토리가 아니라 작품에 잘맞으면서 퀄리티가 있는, 즉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고, 뻔한 스토리 라인이라도 센스있고 합리적으로 잘 배치해서 만들어낸 스토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아이언맨'의 스토리도 아주 좋았다고 생각해요.(스토리가 별로다~라면서 네러티브가 어쩌니 하는 사람들의 평을 보면 대부분 기준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아서-_-;) - 그런 의미에서 스피드 레이서는 이야기의 전개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할 건덕지가 별로 없습니다.
영화 초반부터 정말 노골적으로 만화적인 연출이 나옵니다. 모든 면에서 사실성을 일찌감치 분리수거해서 쓰레기장에 갖다버린 듯한 영상의 향연이 이어지죠. 그게 개그건 진지한 장면이건 간에. 이 이질적인 영상미에 익숙해질 수 있느냐 없느냐로 이 영화에 대한 호오는 끝에서 끝으로 갈릴 것 같기도 합니다. 제 경우는 1분도 안걸려서 익숙해진 다음 정말 신나게 봤습니다만. 게다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오마주도 아주 많이 넘칩니다. 캐릭터로 보면 '레이서 X'가 그렇죠. 이녀석 완전 나이트 슈마하잖아!
게다가 사실 레이싱은 영상 그 자체만이 아니라 구성으로 봐도 그래요. 미래형 레이싱 트랙만이 아니라 사이버 포뮬러 1기 TV판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막이든 산맥이든' 어디나 가는 랠리 레이싱이 존재한다던가.
이 영화는 한국인 배우 비와 박준형이 나온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한국에서 화제성을 만들기 위해 그 점을 계속 부각시켰죠.(아니 뭐 박준형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지만;) 박준형의 경우는 마지막 레이스에서 나오는데 사실 거의 비중 없어서 나온 줄도 모를 정도고(그래도 헐리웃 첫 데뷔인데 그 정도 나왔으면 많이 나온 건지도;) 비는 생각 외로 비중 있게 나와서 놀랐습니다. 헐리웃 데뷔에서 저 정도 비중으로 나오다니 정말 대단하군! 타이조 토고칸이라는 일본인 캐릭터로 나오는데(자막에서는 끈질기게 '태조'라고 쓰지만 아무리 들어도 '타이조'), 좀 많이 싸가지 없고 찌질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멋있어보이는 장면이 없어요. 근데 그런 캐릭터를 잘 연기했더군요. 영어도 생각보다 훨씬 잘하고 특히 액션씬을 생각외로 잘 소화해내서 깜짝! 워쇼스키 남매(...)의 사랑을 받은 보람이 있구나, 비! 기왕이면 워쇼스키 남매(...)의 다음 작품에서도 등장해줬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그외에도 한국을 의식한 듯한 장면도 볼 수 있는데 토고간 모터스의 로고가 한글로 적여있다던가 하는 부분. 처음에는 잘못 본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분명 한글이더군요. ...근데 일본인 캐릭터로 등장시키고, 일본 회사로 등장하는데 그 회사 로고가 한글이라니 이거 지나치게 언밸런스 아닌가? 뭐 어쨌거나;
하지만 정말 보면서 너무 멋지다고 생각한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무리 봐도 슈퍼마리오가 생각나는 아버지는(중간에 아예 똑같은 복장도 하고;) 레이싱 카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습격해온 닌자(...)를 처치하는데, 사실은 그가 전직 레슬링 챔피언이었다는 가공할 비밀이 밝혀지면서 그야말로 대폭소. 아, 내가 졌다. 이건 진짜 당신들이 이겼어, 워쇼스키_no
워쇼스키 남매(...)는 이 작품에 자신들의 오타쿠적 기질을 아낌없이 작렬시켰습니다. 매트릭스 때도 그러더니 이번엔 그냥 아주 일본 애니메에 대한 사랑을 B급전설 애정파워로 모아서 빅뱅 임팩트로 날려버리는 느낌이군요.(의미불명) 그래요, 누군가 말한대로 워쇼스키표 킬빌인지도 모르겠네요 이것은.
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면 아무래도 이거 2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무리 봐도 사이버 포뮬러의 나이트 슈마하의 오마주로 보이는 '레이서 X'의 정체는 사실은 성형수술까지 해서 정체를 감춘 스피드의 형 렉스이고, 그는 '후회한다면 그 후회마저도 내가 감수해야 할 몫이겠죠'라는 멋진 대사와 함께 가족에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 돌아서니까요. '스피드 레이서 11(더블원)'이라는 느낌으로 후속작이 나와준다면 그것도 기대해줄 겁니다!-_-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