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 : 서(序) - 결손은 추억과 기억으로 보충해라!

아, 봤어요. 보고야 말았어요. 봐야지, 봐야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이걸 진짜 보게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서(序). 한때는 친숙한 이웃이었으되 이제는 너무나도 멀어진 구로 CGV에서 보고야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거, 예매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만 디지털관이 아닌 게 꽤 짜증났습니다. 이 작품은 원래 디지털관에서 상영될 퀄리티로 만들어진 것이고(시대는 HD 퀄리티가 기본! 출시될 소스는 당연히 블루레이다!) 화질 낮은 일반 상영관에서 보니까 참 뭐랄까, 복잡미묘하더군요. 스타워즈 에피소드3을 디지털관에서 두번 보고 난 다음에 일반관에서 한번 봤을 때의 기분이랄까. 물론 저는 에반게리온:서(序)를 본 적이 없습니다만 기대하던 화면에 비해서 실제로 눈앞에 들이대어진 화면의 퀄리티는 그런 느낌이었다는 거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제 같이 갔던 모씨(작년에 일본에서 보고 왔음)가 부연해주었습니다. '응. 일본에서 봤을 땐, 훨씬 화질 좋았어.' ...이런 젠장_no '자막이 대체 왜 저렇게 흔들리는 거야? 잘 안보여'라는 불평이 여기저기서 보이는데, 아무래도 해상도가 제대로 맞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도 디지털관에서 보면 깔끔할 것 같아요. 현재의 흥행이 계속되어서 디지털관으로 확충이 된다면 반드시 한번 더 보러가겠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분이 듬뿍 함유된 이야기.


10년만의 에반게리온입니다. 아직 인터넷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고, 묘하게 일본 애니메이션 붐이 일어났던 10년 전에 전 고교생이었지요. 그 당시 에반게리온은 사회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였고 한국에서도 불법복제(자막포함) VHS 등이 불티나게 팔렸어요. 저도 그 열악한 화질의 불법복제 VHS로 에바를 접한 사람입니다. 지금 와서 '당신은 에반게리온의 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반게리온이 폭발하던 그 시절을 기억하고, 수많은 추억을 가진 사람인 건 사실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에반게리온:서(序)를 보러 간 거였지요.

전 에반게리온:서(序)를 에반게리온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물건은 파이널 판타지7 : AC와도 비슷합니다. 오리지널을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에 따라서 호오가 극단적으로 갈릴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전 이번 극장판은 결국 에반게리온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는 대부분 못따라가는 것 같더군요. 분명히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따라가는 사람들이 특이한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 에바를 본 제가 보기에도 이 극장판은 지나치게 빠릅니다. 인물들간의 갈등구조나 사건의 전개가 중간을 비우고 휭휭 워프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던지는 정보량은 압도적으로 많죠. 그 결손부분을 메우는 건 관객의 기억과 추억입니다. 설령 지금은 가물가물하더라도 뇌리 한구석에 박혀있는 그 정보가, 극장판의 결손부분을 메우면서 몰입으로 유도해주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집중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120분, 아니 110분이라도 좋으니까 조금이라도 러닝타임이 더 길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건 어쩔 수 없군요^^;

내용은 사실 TV판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단순히 스토리가 그렇다는게 아니라 대부분의 장면들이 전부 TV판과 같은 콘티를 이용해서 새로 그려진 것이라서; 보고 있노라면 거의 '극장판의 압도적인 퀄리티'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TV판을 리마스터링한 버전을 보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죠. 물론 설정부터 시작해서 장면까지 군데군데 달라져있고, 새로운 장면도 추가되어있어서 앞으로의 전개는 완전히 달라지게 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뭐 당장 스텝롤 다 올라가고 나서 나오는 예고편만 봐도 기존 TV판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지만^^;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무래도 '소리'가 아닐까 싶군요. 극장판에 어울리는 음향은 그렇다 치고, 성우들의 연기에서 그게 느껴집니다. 솔직히 신지나 레이는 '아, 다들 애쓰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흐르긴 흘렀구나'라는 느낌이고, 어른들의 경우에는 이미지를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의외로 마야의 목소리가 굉장히 많이 틀려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뭐 이 아가씨도 딱 어른이라고 보기는 애매한 캐릭터이긴 했지만 지나치게 귀여워진거 아냐 이거?;

작화를 보면, 인물작화는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은 느낌입니다. 예전 극장판 '에어, 진심을 그대에게' 때는 좀 오버해서 작화를 그럴싸하게 만들려고 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원화가인 사다모토의 그림에 충실하게 그려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인물 외의 것들은 전부 현재의 기술을 충분히 살려서 그려냈기 때문에 CG 특유의 공간감이나 박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에반게리온과 사도가 싸울 때 전해져오는 강렬한 힘과 중량감, 그리고 제6사도가 쏘아내는 빔이 작렬할 때의 압도적인 파괴력까지. 이런 부분은 확실히 10년 전의 TV판에서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었던 영역입니다. 아주 만족스러워요.

그리고 사실상 극장판의 주역인(멋대로) 제6사도의 경우 정말 '디지털이 되어서 다행이야. 바로 그거야!'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주더군요. 뭐 한번 빔을 쏠 때마다 압도적인 파괴력이 찌릿찌릿하게 전해져오는 건 그렇다 치고, 그 CG로만 가능한 다이나믹한 변형이라니! 단순히 보면서 멋지다던가, 재미있다던가 하는 차원을 넘어서 사도의 '감정'이 느껴져오더군요. 그 변형 자체가 이모티콘?^^;

모든 사람들이 하이라이트로 꼽는 제6사도와의 결전, 즉 야시마 작전 부분은 정말 굉장합니다. TV판과 전개 자체가 달라져 있기도 하지만 연출 자체가 압도적이죠.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이 부분에서 정말 안노 히데아키가 달라졌다는걸 느꼈어요. 이 아저씨, 예전에 치기 어린 반골이었다면 이제는 어른이 되어서 진심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전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결혼은 대단하군요.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놓다니! 설마 다른 작품도 아니고 에반게리온이라는 타이틀 걸고 나온 작품을 보면서 이렇게 가슴이 뜨거워질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두근두근두근! 심장소리가 쿵쾅거리면서 정말로 눈시울이 붉어질 뻔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위험했어.(한숨)

TV판은 철저하게 개인만을 조명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아닙니다. 야시마 작전은 신지 혼자만이 아니라, 그를 지키는 레이가, 그리고 물러설 길이 없다고 말하며 작전을 지휘하는 미사토와 네르프 사람들이, 그리고 재충전시에 전선 케이블 위를 목숨 걸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서 승리를 일궈낸다는 느낌이죠.

이때 내용상으로도 기존 에바팬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쇼킹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신지의 행동입니다. TV판, 극장판 - 데스&리버스, 극장판 - 에어, 진심을 그대에게, 만화판을 거치는 동안 확고하게 지켜진 이카리 신지라는 캐릭터의 찌질함은 이미 세계최강레벨. 그런데 여기서 그게 깨져버렸습니다. 신지는 이 극장판에서 에반게리온 역사상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선택하고, 움직입니다! 예전에는 미사토가 죽어가면서 떠밀어도 제대로 안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신뢰에 보답했다. 보답해버렸다. 보답해버리고 말았어! 너 진짜 이카리 신지 맞냐!?

신지가 예전 그대로 찌질하게 놀았다면 야시마 작전 부분은 결코 뜨거워질 수 없었을 겁니다. 주변이 아무리 뜨겁게 달아올라도 혼자서 피시식 식어있었을 테니까. 신지의 변화는 바로 안노 히데아키의 변화이고,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시리즈가 앞으로 이전의 에반게리온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갈 것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막판에는 나기사 카오루가 이 시기에 벌써 등장하면서 '이번에도 세번째'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서 매트릭스 시리즈처럼 반복되는 루프세계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습니다만, 실제로 어떤 설정인지는 끝까지 보면 알 수 있겠지요. 올해 일본에서 개봉할 예정인 '파'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부디 이번 '서'가 한국에서 흥행해서 '파'도 한국개봉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아니 역시 그럴려면 나도 두번 보러 가야되나?





덧글

  • 아레스실버 2008/01/28 20:46 # 답글

    1관 디지털 개봉하면 생각해보지. (뭐 난 벌써 두 번 봤으니
  • 로오나 2008/01/28 23:01 # 답글

    실버 // 그럼 나도 보러 가야지 역시.
  • 소녀별 2008/01/29 00:03 # 답글

    크, 정말 즐겁게 보고 왔었죠 +_+
    지갑님 사정이 된다면, 또 보고 싶어요~ :D
  • Sion 2008/01/29 00:45 # 답글

    가끔 그러듯이 이번에도 빈 기간에 용산CGV 아이맥스 관에서 찔끔이라도 걸어줬으면 좋겠어요;;
  • DukeGray 2008/01/29 01:24 # 답글

    디지털 개봉하면 또 보러갑니다...
  • 뱀  2008/01/29 11:08 # 답글

    안노 히데아키가 그렌라간이라도 본 모양이네요.
  • 아레스실버 2008/01/29 13:52 # 답글

    에바 극장판 개봉일시는 9월.

    한국은 1월.
  • 2008/01/30 11:2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창운 2008/01/30 14:57 # 삭제 답글

    극장판의 한게이예요. 감정변화 상당히 빠른 편이죠...
    시간이 짧기 떄문이예요. 드라마처럼 상당히 길지 않아요.
  • 로오나 2008/01/30 21:22 # 답글

    소녀별 // 부디, 디지털로!

    Sion // 아, 그거라도 좋은데 말이죠 정말. 걸기만 하면 사람들 벌떼처럼 몰릴거 같은데^^;

    DukeGray // 저도 물론!

    뱀 // 결혼 때문이라고 추정중입니다. 사람이 변한 거죠.

    아레스실버 // 서가 흥행하면 파는 좀 빨라지지 않을까~ 싶어. 원래 한국은 세계최초 워낙 좋아해서.(...)

    비공개 // 인간은 변하기 마련이죠.(웃음)

    창운 // 사실 극장판 러닝타임은 엔딩스탭롤을 제외하고 90분 정도였고, 그 정도면 TV판 5화에 가까운 분량이죠.(오프닝/엔딩 제외하면 보통 19분 정도밖에 안되는게 TV판이니까요) 좀 부족했던 느낌인데, 그래서 러닝타임이 20분만 더 있었어도 충분히 여유있는 호흡이 되었겠다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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