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웃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던 전적이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개관에서만 개봉하는 엽기적인 형태로 배급된 영화. SF팬들에게는 열광적인 인기를 갖고 있는 작품이니만큼 제목을 한번쯤 들어보신 분들도 많을 듯합니다. 수입사측은 '미국 박스 오피스 1위! 그러나 국내 개봉은 단, 한 극장! 별난 영화! 별난 개봉!'라고 광고하고 있긴 합니다만, 유일하게 개봉되는 극장인 필름포럼 극장이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극장임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지요.(먼산) 덤으로 공식홈페이지도 없고
공식카페가 네이버에 마련되어있습니다. 그냥 개봉했어도 무조건 쫄딱 망했을 거라고는 말할 수 없는 영화인데 이런 식이라니 좀 슬프기까지 하군요_no
일단 필름포럼 극장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참 좋았습니다. 뭐랄까, 굉장히 옛날 극장 느낌이에요. 일단 극장이 있는 낙원상가와 그 주변부부터 오래된 느낌을 팍팍 풍겨주는 데다가, 극장이름을 필름포럼으로 바꾸면서 내부시설을 좀 바꿔놓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봐야 뭘 합니까? 매표소를 향해 한발짝 나가면 건너편에는 오래된 악기점이 있고 한쪽에는 아래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탁트인 옥상난간. 그 출구 쪽에는 커다란 간판이 걸려있어서 '우와, 오래 됐구나'란 느낌을 팍팍 풍겨주는데. 저는 이런 분위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요즘은 CGV를 비롯한 멀티플렉스 극장들만 다녀서 그런지 오랜만에 접하는 이런 극장의 모습이 엄청나게 신선하게 느껴지더군요.(그립기도 하고) 영화관 시설 자체는 그리 나쁜 편은 아닙니다. 좌석배치가 완만~해서 맨 앞자리에서 봐도 좋을 느낌이고.
그리고 영화 자체가 국내 전체에서 필름포럼 단 한곳에서만 상영하고 있다 보니 정말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화에 귀를 기울여보니 대전과 부산에서 온 분들도 있더군요. '정말 보고 싶은 사람만' 왔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덕분에 영화를 볼때도 정말 기분좋은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스포일러분을 듬뿍 첨가한 내용에 대한 이야기
일단 원작을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주 좋았습니다. '아, 저기서 저 대사는 하나 더 나왔어야 하는 건데!'라던가 '아니, 저 부분은 저거보단 그게 낫지 않나?'라는 생각이 간간히 들기는 했는데 신경 써서 만들어진 영상 그 자체가 정말 유쾌하고 즐거웠지요. 사실 원작은 작가 더글라스 아담스의 압도적이라고 할만한 재치가 번뜩이는 문장들이 매력의 7할을 차지하고, 그것은 영화에서는 도저히 살릴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텍스트의 승리를 보는 것 같아서 유쾌하다) 전체적인 센스를 얼마나 잘 살리면서 영화를 만드는가가 관건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잘 되었다고 봅니다. 확실히 원작을 본 입장에서는 내용압축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인데, 애당초 영화 자체가 치밀함이니 개연성이니 하는걸 따지고 보는 성격이 전~혀 아니라서 정신없고 떠들썩하고 즐겁게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영상에 여러모로 신경쓴 흔적이 많이 보여서 원작을 읽은 입장에서도 '우와, 영상으로 만들면 이렇게 되는구나!'하는 즐거움에 압도되서 단점이 부각될 정신이 없더군요.(웃음)
사실 이 영화의 영상은 요즘 헐리웃 블록버스터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미묘한 느낌을 줍니다. 애당초 화면의 느낌 그 자체가 다르다고 할까요? CG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소품을 이용해서 찍었던 옛날 TV시리즈나 영화의 느낌을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으로 업그레이드시켜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돈 많이 들여서 압도적인 화면을 만들었다는 느낌은 안드는데, 외려 친숙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는 확실히 이런 느낌의 화면이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물론 이건 개인취향 문제니까 다른 분들은 다르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원작을 본 입장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 우울증 걸린 로봇 마빈의 존재겠지요. 원작 팬들 사이에서는 마빈에 대한 평이 좋다, 나쁘다고 상당히 확실하게 갈리는 것 같습니다. 제 경우는 '좋다'입니다. 확실히 원작과 비교하면 떨어지는 느낌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앞서 언급한 더글라스 아담스의 문장이 영화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잘되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역시 찬반이 갈리는 것이지만 마빈의 대갈통이 와방 크다는 걸 팍팍 부각시킨 디자인이 매력을 더해주었다고 생각하는데요.(저런 모습으로 우울해하고 있으니 비주얼적으로 느낌이 딱 온달까^^;)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들었던 부분은 복제품 지구 제작(...) 부분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정말 유쾌한 느낌을 너무나도 잘 살려서 만들어놓았더군요.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초반 지구박살(...) 부분은 좀 실망스러웠지요. 같이 본 아이의 반응을 보니 원작을 안본 입장에서는 그걸로도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만.(웃음)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말할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줄거리를 요약해놓고 뭐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원작을 보신 분들도, 영화를 보신 분들도 모두 제 말에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시작한지 10분만에 지구가 은하제국 대통령의 무책임함과 행정상의 문제로 인해서 그냥 멸망하는 것도 아니고 깔끔하게 우주에서 소멸해버리는 영화란 말입니다! 더이상 뭐라고 할 수 있겠어요?
아,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주인공 아서가 자기집을 밀어버리려는 인부들 앞에서 항의할 때 '게시판'에 대한 언급을 안한 것과, 보곤족이 지구를 날려버릴 때 고작 4광년 떨어진 곳에 공고되어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점이었습니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해두자면, 언급 자체는 되었는데 원작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생략되어있습니다) 한마디씩만 첨가해줬어도 초반부가 훨씬 맛깔스러운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외에는 역시 초반에 술집에 가서 아서와 맥주를 마셨을 때 주인장이 '마지막 주문을 받겠습니다'할 때까지 전혀 '진짜 마지막이구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느낌이 안들었달까. 흠칫, 하는 연기 정돈 해줬으면 좋았을텐데. 이런식으로 군데군데 '이 부분은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왔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이 있었지요. 너무 여유가 없이 팍팍팍팍 지나가면서 생기는 단점이라 하겠습니다.(뭐 영화에는 러닝타임이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리고 또 하나 언급해야할 것이 번역! 저는 사실 원작을 구판으로 읽어보았습니다. 1, 2권은 어떻게 어떻게 구했는데 3, 4권은 끝내 구할 수가 없어서 친구에게 빌려서 읽었지요. 영화를 보고 나니 신판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어쨌거나 구판과 비교해보자면 책쪽이 좋았던 곳도 있고, 영화쪽이 좋았던 곳도 있습니다. 한가지씩 예를 들어보자면 'Don't Panic'이 책에는 '겁먹지 마세요'로 번역되어 있는데 비해 영화에는 '쫄지 마라'로 번역되어있습니다. 영화 쪽이 압도적으로 좋았던 부분입니다. 그에 비해 철학서 3부작의 제목 번역은, 마지막권의 제목만 예로 들자면 책에는 '도대체 이 신이란 작자는 뭐하는 사람이야?' 영화에는 '신이란 누구인가?'로 책쪽이 압도적으로 좋았지요.
이 영화의 자막은 21세기답게(?) 가로자막을 채택하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면서 짜증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막글자에 테두리를 둘러주지 않아서 종종 출연하는 흰 화면에 글자가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때마다 집중력이 깨져서 짜증이 좀 났습니다. 아마 세로자막이었으면 거의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 아니었을까 싶군요.
영화에는 우주선 '순수한 마음'호의 변신원리를 설명하는 부분이 삭제되어있다고 합니다.(그러니까 원래 있는데 우리나라에 들여오면서 삭제했답니다. 대체 왜?) 하지만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니까 여건이 되신다면 꼭 극장에 가서 보시길 권하고 싶군요. DVD나 비디오로 감상하면 상당히 재미가 반감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감히 삭제를 하다니! 삭제된 영화 따위 영화관에서 볼 수 없어!'라고 생각하시는 여러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 값어치가 충분한 영화이기 때문에 그 점에 얽매여서 극장에서 볼 기회를 놓치신다면 그건 정말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자, 그럼 모두 '쫄지 마라!' 앗싸!